나로 인정받고 싶다는 마음이, 나를 가장 멀리 데려간다
인정 욕구는 타인에게 인정받고자 하는 인간의 본능적인 심리다.
존재 가치를 확인하고 자존감을 지키기 위해, 우리는 타인의 시선을 끊임없이 의식한다.
그러나 이 욕구는 때로 역설적으로 작용한다.
나로서 인정받고 싶다는 갈망이, 오히려 나 자신을 부정하게 만든다.
사회의 틀에서 벗어나기 위해, 우리는 아이러니하게도 그 틀 안에 몸을 구겨 넣는다.
‘있는 그대로’라는 말이 무색할 만큼, 있는 그대로의 나는 점점 사라진다.
서장원의 <리틀 프라이드>의 화자 역시 이 모순의 중심에 서 있다.
그는 자신이 트랜스남성이라는 정체성으로 살아가면서, 늘 질문을 멈추지 못한다.
“나는 과연 충분한가?” “나는 진짜 남성으로 보일 수 있을까?”
그 질문들은 곧 불안으로 변하고, 불안은 다시 타인을 향한 재단으로 이어진다.
그는 동료 오스틴을 보며 ‘작은 키를 보완하기 위해 유쾌한 캐릭터를 연기하는 남성’이라는 틀에 맞춰 해석하고,
그렇게 해석한 이유조차 자신에게 되돌려 자문한다.
“그건 내가 트랜스남성으로서 익혀야 했던, 그러나 익히지 못했던 역할 중 하나였다.”
이 문장에서 드러나는 것은 단지 오스틴에 대한 분석이 아니다.
그건 사회가 강요한 ‘인정받는 방식’에 스스로 익숙해진 자의 시선,
그리고 그 시선으로 자신조차도 평가하고 있다는 자각의 장면이다.
토미 자신이 타인의 조건을 분석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독자 역시 그 조건 안에 맞춰 존재하려 했음을 눈치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독자는 토미가 더 이상 순수하게 ‘나’로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리틀 프라이드>가 그려내는 모순은 단순히 타인의 인정에 대한 갈망에서 끝나지 않는다.
그 인정이 어떤 조건을 전제하는지를 조용히 드러낸다.
인정은 언제나 선택적이고, 사회적으로 유효하다고 여겨지는 모습에만 허락된다.
그런 구조 속에서 ‘나로서 인정받기’는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 된다.
그리하여 우리는 나로 살기 위해 ‘나’를 지우고, 나를 증명하기 위해 ‘나 아닌 무엇’을 연기한다.
그럴수록 진짜 나는 멀어지고, 인정받는 나는 더욱 조작된 모습이 된다.
<리틀 프라이드>는 그 간극을 냉정하게 보여준다.
화자는 인정받지 못할까 봐 불안해하면서, 동시에 타인의 논리를 미워하고 또 수용한다.
자기 존재를 증명하려는 몸부림이 결국 자기부정으로 향한다는 것,
그것이 이 소설이 보여주는 가장 깊은 역설이다.
결국 이 작품은 묻는다.
나는 나로서 존재하고 있는가?
아니면, 나로 인정받기 위해 내가 아닌 ‘너’를 흉내 내고 있는가?
이 질문은 단지 소설 속 화자에게 던져진 것이 아니다.
오늘날을 살아가는 모든 이에게, 조용하지만 집요하게 다가오는 질문이다.
<리틀 프라이드>는 그 질문 앞에 우리를 세운다.
그 누구도 아닌, 나의 시선으로, 나 자신을 다시 바라보게 만든다.
그리고 나는 이 질문 앞에서 멈춰 선다.
인정받고 싶다는 마음이 만든 ‘나 아닌 나’를 조용히 바라보며,
지금 이 자리에서 묻는다.
“나는 지금, 정말 나로 존재하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