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형 쇼핑몰 입구 3미터 남짓한 건널목, 교통정리도우미도 경찰요원도 누구도 없는데 차들이 한참을 서 있다. 사람들 계속 건너는데 언제까지 기다리려나. 아직도 그리고 또 그대로. 자꾸만 뒤를 돌아보던 나의 모습이 브리즈번 첫날이었다.
하굣길의 차들은 그냥 계속 서 있는 듯
저기 멀리서 달려오던 차는 나를 보자마자 얼음이다. 마치 원래 움직이지 않았던 것처럼 김소월의 “저만치 혼자서 피어있네”의 저만치이다. 멈칫하는 나를 보고 환히 웃으며 어서 가라고 손짓까지 하면 이거 너무 친절한 거 아닌가. 그리고 돌아보니 교복 입은 학생들은 아예 고개를 돌려보지도 않고 건너고 있다. 얘들아, 여기 차 다니는 도로거든 좌우를 살피고 건너야지-도 무색하게 그러려니의 표정으로.
이토록 사람이 우선이란 말인가. 그 답은 운전연수를 받으면서 찾을 수 있었다.
오른쪽으로 나가야 할 것 같은데 왼쪽으로 나가는 건 맨날 헷갈림
벌금이 셉니다. 신호등 속도위반 조금만 어겨도 바로 딱지 날아와요. 차랑 사람이면 당연히 사람이 우선이죠. 동양인은 많아졌는데 운전 좌우를 헷갈리니 보이죠 킵레프트(Keep left) 친절하게 돌 때마다 세워뒀어요. 오르막 심하다고요? 하하 이 정도는 뭐. 가급적 원래 있는 땅의 모양을 건드리지 않고 길을 만든 거예요. 이거 라운드어바웃 돌고 돌고 많기도 해요. 오른쪽 켜고 들어가서 왼쪽 켜고 나오기.
호주에는 저렇게 돌고 돌아나가는 라운드 어바웃이 많다.
호주 와서 만난 한국분이라 반갑기도 했는데 그냥 지나가며 보던 것들을 하나하나 알려주시는 내용이 아 네 이것도 저것도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무엇보다 오른쪽에 운전석이 있고 깜빡이도 오른쪽인데 자꾸 왼쪽 깜빡이를 올린다. 그러면 그 결과는? 햇볕 짱짱한 이 브리즈번에서 혼자 아 유리창을 닦고 있는 것이다. 다시 한번 여러분에게도 오른쪽 운전석에서 운전할 때는 왼손 가만히 오른쪽 크게 돌기.
반대편 운전석에서 온 사람들을 위해 도로에는 킵 레프트 표지판이 꼭 꼭 있다.
양보운전이 중요해요. 직진해서 달리는 차가 우선이니 좌우를 살피고 직진 차 보내주고 출발. 양보운전이라. 그 말도 참 마음에 드는데. 원래 운전이라는 것이 양보가 우선인 거지. 안 그러면 이것은 얼마나 위험한 움직임들인가. 그랬다 도로에 들어설 때 저기 차가 보이면 깜빡이 켜고 잽싸게 끼어드는 거지가 여기선 안 통한다. 정말 아무도 오지 않나 봐 아무도 안 오나 봐 일 때 도로에 들어오는 차들. 그렇다 보니 처음에 도로로 들어오려고 선 차들을 보면 살짝 긴장되었는데 이제는 나 직진이니 절대들 안 들어오지 아무렴 마음이 편하다. 반대로 우리는 얼마나 잽싸게를 중시했는데 싶기도 했다. 저기 차가 들어오려고 서있으면 마구 밟아서 못 들어오게 하기도 했으니. 이것은 결국 운전하나에도 여유가 없는 우리나라의 안쓰러운 현주소이기도 했다. 땅이 넓으니 마음도 넓은. 그러나 그것이 다는 아니다.
그렇게 천천히, 보통 우편물은 14일 이내라고 쓰여 있다. 4일도 긴데 14일? 땅이 크니까 아무렴이지만 은행 체크카드도 운전면허증도 세월아 내월아 난 잊었다 하면 이게 뭐지 할 때 와있다. 무언가 질문을 하면 잠시만 기다려봐 연결 또 연결 나중에 연결해 줄게 그러면 또 다음주가 된다. 한국인 근무자를 선호한데요. 성실하고 책임감이 강하다고요. 그래 우리 민족이 그렇지. 반대로 호주 사람들은. 그래 그냥 이렇게, 한 달 아닌 것이 어디야. 뭔들. 이 넓은 땅에서 무어가 그리 바쁠 것이 있나. 그렇게 우리 집 앞마당에서 나무가 뽑혀서 다음 잔디를 덮을 때까지 우리는 한 달 이상을 기다려야 했다. 앞마당과 잔디 이야기는 다음 편에서.
다시 차와 사람. 이토록 넓은 쇼핑몰이라고 하면 감이 잘 안 오니 쇼핑몰 한쪽에서 반대편까지 그냥 아무것도 구경하지 않고 걸어도 30분이 걸린다고 말해두자.(사실이다.) 집 근처의 이 쇼핑몰 이름은 가든시티인데 대형쇼핑센터와 백화점의 매장들이 모두 길쭉하게 집대성되어 있고 버스들도 많이 오가는 지역의 중심부이다. 그런데 여기에 출입구가 하나라고? 처음에 이 출입구 때문에 한참을 이리 저리 헤맸다. 이쪽 끝에 입구가 있으니 저쪽에도 그리고 중간에도 있겠지 오르락 내리락. 없다. 주차장만 있을 뿐, 결국 출입구 엔트렌스는 하나다.
땅덩이가 넓은 이곳에서 차 없는 생활이란. 옆동네까지 만보 뒷동네 가려면 만보 세상에 하루 삼만보. 버스도 잘 오지 않고 와도 또 걸어야 원하는 그곳에 도착. 지하철은 없고 전철(기차)은 저기 멀리인데 또 내려서 걸어가고 기다리고. 그래 차 없이는 안 되겠어. 그러므로 차를 가지고 이동하고 움직이는 나라의 개념에서는 입구는 하나면 되는 것이다. 세상에 그걸 모르고 여기 구멍으로 나오면, 아이고 길이 없네 저기 주차장에는 인도가 없잖아. 그렇게 한동안 나는 주차장에서 혼자 걸어 다니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주차장이든 도로이든 동네든 어디든
사람을 보면 차는 먼저 선다. 얼마나 빨리 가겠느냐는 마음처럼
사람이 확실히 건넌 것을 확인하고 움직이는 차들
이것은 맞는 것이다. 이것은 옳은 것이 아니라 맞는 것이다. 우리는 얼마나 차에 대해 긴장하고 살았나 싶다. 사람이 우선인 것, 어느 보도 어느 도로 어느 블록에서든. 사람이 보이면 무조건 선다. 심지어 나는 종종 사람이 혹여 차로 인해 위협을 느낄까 봐 과도할 정도로 정지하는 차를 보기도 한다. 처음엔 대강 가던 나도 이제는 저-만치 떨어진 사람이 보여도 선다. 확실히 차가 오지 않아야 끼어든다. 구불구불 위로 아래로 속도도 길의 모양에 따라 50이다가 60이다가 40이면서 자주 변하는 이 땅에 맞추어 너무 달리지도 너무 느리지도 않다. 그것이 호주의 삶이니까. 사람과 땅의 모양을 헤아리면서 나는 오늘도 시동을 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