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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etroBoyKorea Aug 23. 2024

경제발전의 상징이냐 흉물이냐,  회현 제2시민아파트

철거를 앞두고 있는 최후의 시민아파트

 1950년부터 1953년까지 3년 간 전 국토를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은 6.25 전쟁이 끝나자,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일자리를 찾아 수도 서울로 몰려들었다. 모든 인프라가 말 그대로 "소멸"한 상황에서 전후복구를 위한 인적, 물적 자원이 수도로 몰리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이치일 것이다. 1950년대~1970년대 서울은 만성적인 주택난에 시달렸는데, 산자락과 개천변, 그 외 사람의 손길이 닿는 모든 곳에 천막인지 판잣집인지 모를 것들이 우후죽순 셀 수 없이 들어설 정도였다. 전수조사 결과 13만 6000동 이상의 무허가 판잣집이 집계되었는데, 이 "불량주택"들은 열악한 주거 환경 문제는 물론, 무허가 판자촌 강제 철거 정책에서 비롯한 철거민 주거권 문제 등 많은 문제를 낳았다.

판잣집의 고질적인 문제를 지적하는 기사 (좌), 1972년 청계천변의 무허가 판잣집들 (우) - 사진 출처 서울기록원
1966년 1월 24일 경향신문 5면
都市(도시)의 고질 板子(판자) 집
火災(화재) 위험등 南山洞(남산동)이 본보기
 犯罪溫床(범죄온상)이기도
山番地(산번지).... 그 數字(숫자) 알지 못해
果敢(과감)한 住宅政策(주택정책) 긴요

  누군가는 이 문제를 뿌리 뽑아야 했지만, 위 기사에서도 "과감"하다고 표현했을 만큼 해결책은 판자촌을 전부 철거해 버리는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선뜻 손을 대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1960년대 대한민국은 이러한 "과감"함을 발휘할 정치적인 배경이 있었다.


 "과감한 주택정책"은 머지않아 구체적인 계획으로 나타난다. 1961년 5.16 군사정변으로 집권, 1963년 제5대 대통령으로 당선된데 이어 1966년 재선에 성공한 박정희 대통령은 같은 해 서울시장으로 군인 출신의 김현옥을 임명한다.

김현옥 (1926~1997) 제14대 서울특별시장

 김현옥 시장의 별명이 바로 "불도저"였는데, 군인 출신 특유의 추진력을 바탕으로 여러 건설 과업들을 계획했고 시행했기 때문에 지어진 별명이라고 생각한다. 서울 시내 판자촌을 "불도저로 밀어버리고" 그 자리에 영세민과 철거민들을 위한 아파트를 세워 주거환경을 개선하겠다는 목표의 "시민아파트 건설 계획"도 김 시장이 추진한 여러 건설 과업들 중 하나이다.


서대문 금화산 금화지구 등 7개 지구에 영세민아파트 건설 계획을 알리는 기사 (좌), 1969년 금화시민아파트 준공식에 참석한 박정희 당시 대통령 (우) 사진 출처 대통령기록원
1968년 6월 25일 동아일보 8면
零細民(영세민) 아파트 100채 建立(건립) 7개 地域(지역)에 來年(내년) 6月까지
金玄玉(김현옥) 서울시장은 二十五(이십오) 일 판잣집 十五萬(십오만)채 철거
계획의 일환으로 오는 七(칠) 월부터 내년 六(육) 월까지 서울시내 七(칠) 개 지역에 영세민아파트 一百(일백) 동을 세우겠다고 말했다...

 그렇게 1969년 금화시민아파트 1차분 19개 동 850세대를 시작으로 판자촌을 철거한 서울 시내 곳곳에 시민아파트들이 들어서게 되었다. 판자촌이 대개 산자락에 있었기에 그 자리에 들어선 시민아파트도 지대가 높았다. 왜 이렇게 지대가 높은 곳에 아파트를 지었느냐는 누군가의 질문에 "야 이 새끼들아 청와대에서 잘 보이게 높은 곳에 지어야 할 것 아니야!"라고 김현옥 서울시장이 일갈했다는 (...) 설도 있다.


 어쨌든 당시 계획에 의하면 1971년까지 2000동가량의 시민아파트를 짓겠다는 계획이 있었고, 그 계획은 일단 표면적으로는 순탄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표면적으로는...


 요즘 아파트 단지를 하나 짓는데 기초 공사부터 준공까지 대략 3~4년이 소요된다. 그런데 금화시민아파트 1차분을 짓는 데는 고작 1년 정도밖에 걸리지 않았다. 짧은 시간에 튼튼한 아파트를 대량으로 찍어냈으면 참 좋았겠지만 문제는 그러지 못했다.

1970년 3월 17일 조선일보 8면
煉炭(연탄) 가스 無防備(무방비) 公營住宅(공영주택) 中(중) 73%나
서울시내 시민아파트등 공영주택 1천9백49개소 가운데 73%인 1천4백22개소가 연탄가스에 무방비상태임이 16일 서울시경조사결과 밝혀졌다.

 그렇게 크고 작은 문제가 발생하던 1970년 4월 8일..

1970년 4월 9일 조선일보 1면
臥牛(와우) 市民(시민) 아파트 崩壞(붕괴)
70餘(여)名(명) 매몰 27名(명) 죽고 3~4名(명) 生死不明(생사불명)
金(김) 서울市長(시장) 辭表(사표)를 提出(제출)

 급기야 서울 마포구 와우시민아파트 19개 동 중 1개 동 (15동)이 무너지는 대참사가 벌어지고야 만다. 서울 시내 한복판에서 아파트가 무너져 하루아침에 34명이 목숨을 잃고 40명이 부상을 입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야 만 것이다. 김현옥 서울시장은 사고 책임을 지고 그날부로 사표를 제출했으며 시민아파트 건설 계획도 즉시 중단되었다.


 붕괴 원인은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부실공사. 낮은 건설 원가로 아파트를 지은 데다가 당시 만연했던 중간 업체들과 공무원들의 부정부패로 인해 아파트는 각종 원자재를 빼먹은 채 부실하게 지어졌다. 게다가 무너진 와우아파트 15동을 시공했던 업체인 대룡건설은 무면허 업자인 박영배에게 불법 하도급을 맡기기까지 했다는 사실이 붕괴 이후 조사 결과 밝혀졌다.


 이미 지은 시민아파트 434동 중 80%가량이 안전에 문제가 있는 것으로 밝혀진 후속 조사 결과는 이쯤 되면 놀랍지도 않을 정도였다. 이후 시민아파트는 이미 사람들이 들어가 살고 있어서 바로 허물어 버릴 수도 없었기에, 버틸만한 아파트는 사람이 살면서 계속 보수하고, 보수하다 못해 못 쓰게 되면 순차적으로 철거하는 방식으로 후속 대책이 세워졌다.


 이미 짓고 있던 시민아파트는 골조를 더욱 보강하여 짓도록 하였는데, 그 아파트가 바로 회현 제2시민아파트이다. 분류상으로는 시민아파트지만 시민아파트의 부실 이미지 탈피를 위해 시범아파트라고 이름을 붙였고, 지금도 시민아파트와 시범아파트 명칭이 혼재되어 쓰인다.

1970년 5월 28일 경향신문 8면
회현제2시민어파트(아파트) 入住(입주)
서울 중구 회현동 1가 산 1의 2에 지난해 4월 착공했던 회현제2시민어파트(아파트)가 완공, 28일 상오 梁(양) 시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입주식을 가졌다.

 (*기사 말미 엘리베이터가 놓였다는 언급은 잘못된 것인데, 당시로서는 드문 10층 규모의 아파트임에도 불구하고 엘리베이터가 설치되지 않았다)

 집집마다 태극기가 걸리고, 이사를 들어오는 짐들이 입구에 가득 쌓여있는 생기 있는 1970년 회현제2시민아파트의 모습을 상상해 보자. 번듯하게 지어진 고층 시민아파트에 부푼 꿈을 안고 입주하는 가족들의 마음은 어땠을까...


1991년 4월 13일 경향신문 12면
臥牛(와우) 아파트 모두 헐린다
남은 4個棟(개동) 다음 달 철거

 붕괴 참사가 일어났던 와우아파트는 1970년 이후 순차적으로 철거를 진행, 마지막 남은 4개 동이 1991년 철거됨으로써 그 쓰임을 다했다. 다른 시민아파트들이 흉물스러운 모습으로 노후화되어 철거되는 것과는 달리, 상대적으로 튼튼하게 지어진 회현 제2시민아파트는 철거를 면하고 계속 공동주택의 기능을 다하고 있었다.


 그러던 2004년, 안전진단 실시 결과 "미흡"에 해당하는 D등급이 나오자 회현 제2시민아파트를 철거하고 남산 주변 환경을 정리하려는 계획이 세워졌다. 2003년 먼저 철거된 이웃 회현 제1시민아파트 주민들은 송파 장지지구 (송파 파인타운) 입주권을 받아 입주했고, 회현 제2시민아파트는 강남 세곡지구 입주권을 받을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고 한다. 이 때문에 아파트 호가가 급등하기도 했으나 어디까지나 소문일 뿐이었다. 아무튼 이 계획은 거주민들과의 보상 문제를 둘러싼 마찰로 인해 결국 좌초되고 말았다.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16/0000161024?sid=101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정권이 바뀌어 2011년 제35대 서울특별시장으로 박원순 시장이 취임했다. 박 시장은 잘 알려져 있다시피 재개발과는 반대되는 도시재생 사업을 추진했고, 이러한 정책 기조에 따라 회현 제2시민아파트 또한 철거 대신 구조 보강 후 리모델링으로 계획이 바뀌었다.

https://www.hani.co.kr/arti/politics/politics_general/850174.html?utm_source=copy&utm_medium=copy&utm_campaign=btn_share&utm_content=20240812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366/0000337450?sid=101

 그러나 리모델링은 빠르게 진행되지 못하고, 2021년 박원순 시장이 임기를 다 채우지 못한 채 숨지면서 빛바랜 계획으로만 남게 되었다. 박 전 시장 사망 후 치러진 보궐선거에서 당선되어 다시 서울시장으로 복귀한 오세훈 시장은 자신의 지난 임기 때 추진했던 철거 계획을 다시 세웠다.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15/0004773722?sid=101


 2023년 여름 방문한 회현 제2시민아파트. 이때는 입구에 잠금장치 같은 것도 없어서 내부에 들어갈 수 있었다. 대다수의 세대가 집을 비웠지만 아직 극히 일부 세대는 거주 중이었기에 조용히 내부 사진만 촬영하고 밖으로 나왔다.

 

 출입구는 총 세 군데이다. "회현 시범" 글자가 쓰여있는 6층 구름다리, 그 왼쪽 옹벽 아래로 나 있는 가파른 계단을 내려가면 나오는 출입구, 그리고 별장아파트 쪽으로 더 들어오면 있는 "빨래 널지 마시오"라고 쓰인 녹색 난간이 있는 7층 구름다리까지.


 옹벽 아래쪽 저층은 대낮에도 해가 거의 들지 않아 어둡고 습했다. 사람이 거의 떠난 아파트라 더욱 음습한 느낌이 들었는지도 모른다. 분명 지상이지만 지하실 깊은 곳을 돌아다니는 듯했다.


 아파트 내부 벽에는 2016년도에 부착한 리모델링 사업 관련 안내문이 그대로 붙어 있었다. 6년의 시간이 지났지만 바로 어제 붙인 듯 선명했다.


 2024년 8월 3일, 남산에 온 김에 회현 제2시민아파트도 다시 들러 사진을 남겼다. 작년에 철거가 확정되었지만, 아직 보상에 응하지 않은 일부 세대가 이주하지 않고 있어 철거가 늦어지고 있다. 지난번 방문 때와는 달리 외부인이 들어갈 수 없게끔 철문과 잠금장치가 생겼다. 입구에도 "입주민 외 출입금지" 문구가 새로 부착되었다.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81/0003457683?sid=102

 얼마나 더 오래 회현 제2시민아파트가 버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서울시에서 이미 아파트 철거 후 들어설 복합 문화 공간 건립 계획까지 확정했고, 이미 대다수의 세대 (총 352세대 중 325세대)가 집을 비웠기 때문에 오래 버티기는 어려울 것 같다. 일단 시에서는 남은 27세대와의 보상 협의를 서울주택도시공사 (SH공사)에 일임하는 한편, 2026년 상반기 철거로 계획을 미룬 상태다. 그동안 여러 차례 철거 계획이 나왔지만 이번에는 철거를 피하기 어려울 같다.  


 회현 제2시민아파트는 마치 홍콩의 고층맨션을 보는 듯한 특유의 분위기로 인해 여러 차례 방송과 뮤직 비디오 등 대중매체에서 촬영지로 등장했다. 또 최후의 시민아파트라는 특수성으로 인해, 회현 제2시민아파트는 시민아파트의 건축적인 가치를 탐구하는 여러 논문, 건축 설계 작품들에서도 자주 소재로 등장하곤 한다.

MBC 예능 무한도전에 여러차례 등장한 회현제2시민아파트

 회현 제2시민아파트가 철거되면 이제 대한민국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던 "시민아파트"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개발을 둘러싼 여러 이권과 정치적인 입장이 중첩되기 때문에 견해를 밝히기 조심스럽지만, 개인적으로는 독특하고 이국적인 분위기를 주는 역사적인 장소가 사라지는 것이 아쉽다.


 "세월의 흐름과 서민의 애환이 녹아있는" 남산 자락의 시민아파트가 많은 사람들의 머릿속에 기억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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