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서른아홉이 되던 해, 나는 유독 나이에 꽂혀 기분이 가라앉곤 했다. 직접적으로 말해 마흔이 되는 게 싫었다. 하지만 당시에 나는 “왜 마흔이 되는 게 싫지?”라는 물음을 한 번도 하지 않았다. 정확한 이유를 모르니 헛된 생각에 빠져 발전 없이 허우적대곤 했다. 의미 없이 아이에게 “누군가 엄마의 나이를 물으면 스물일곱이라고 해.”라고 말하곤 했다. 왜 그 나이이어야 하는지, 왜 마흔은 안되는지 알고자 하지 않았다. 그저 ‘나이의 앞자리가 바뀌니 늙게 느껴져서 싫은 건가 보다’라는 남들에게 들은 막연한 이야기를 당연하게 여겼다. 하지만 이상하다. 서른여덟에서 서른아홉이 될 때도 나이는 똑같이 먹었고 그만큼 늙었지 않은가? 심지어 나는 어릴 적 노안이어서 그런지 나이 들수록 더 젊어 보인다는 소리를 들어서 늙어 보이는 것에 대한 문제는 아닌 것이 분명했다.
내가 이 부분에 대해 명확하게 깨달은 건 그로부터 5년이 지난 뒤였다. 마흔을 앞두었던 그 당시의 나는 단순히 나이가 드는 게 싫었던 게 아니다. 그렇다면 왜 그리도 마흔이 되는 게 싫었을까? 당시 나에게 마흔이 된다는 것은 내가 꿈꾸던 많은 일들을 포기해야 한다는 의미로 여겨졌다. 어릴 적부터 나는 하고 싶은 것도 많고, 되고 싶은 직업도 많았다. 초등학교부터 중학교, 고등학교를 거치며 수십 개의 장래 희망이 있었다. 이른 나이부터 나는 N잡러를 꿈꾸던 시대를 앞선 미래형 인간이었다. 그러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의 나는 의사나 유전 공학자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내가 고1 때 우리나라는 IMF를 겪었고, 나의 고등학교 제주도 수학여행도 사라지는 시대에 살았다. 그것은 사회 전반적으로 안정적인 직업이 인기를 끌게 될 것임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그렇게 2001년 대학에 들어가야 했던 나에게 남성 우월과 남녀 차별이 당연한 진리라 믿고 살아오신 부모님은 교대에 들어갈 것을 권유했다. 어릴 적 수많은 꿈 중 대학교수가 있었으니 비슷한 초등교사를 하라고, 여자는 애도 키워야 하니 그만한 직업이 없다고, 무엇보다 공무원이라 안정적이고 방학도 있으니 편하다고 하셨다. 고3 생활 동안 몇 번 이야기하셨지만, 그리 주의 깊게 듣지 않았다. 그보다 더 많이, 자주, 깊이 있게 들었던 고3 담임선생님의 “말은 태어나면 제주도로, 사람은 서울로 가야 한다”라는 이야기는 다음 해에 펼쳐질 나의 꿈같은 서울 대학 생활을 생생하게 그리기 충분했다. 그렇게 고3을 보내며 수능을 치렀고, 당시 나에게 큰 영향을 주었던 고3 담임선생님과 우리 엄마는 나도 모르게 교대 특차 원서를 제출하셨다. 생각보다 수능 점수가 더 높게 나왔던 터라 지방의대나 서울 지역의 잘 나가는 사립학교 유전공학과 등 이런저런 꿈을 꾸고 있던 내게 살던 곳의 지방 교대 특차 원서 제출 소식은 상당한 충격이었다. 서울교대라도 써주셨다면 내 기분이 좀 나았을까? 태어나 처음으로 반항이라는 것을 시도했고, 한 달가량 울며 떼를 썼지만 결국 교대 특차 면접에 가서 웃으며 성실하게 답변하고 온 것은 스무 살을 시작하는 나였다. 교대 가면 예쁜 옷도 가득 사주고, 빨간색 스포츠카도 사준다는 당시 우리 집과는 거리가 멀어도 너무 먼 약속을 굳게 믿었던 철없는 스무 살이었다. 우리 집에는 나의 서울 지역 학비나 생활비도, 오빠의 뒤를 이어 지원해 줄 의대 학비도 없다는 서울에서 공부하고 있던 언니의 부탁도 큰 몫을 했다. 그렇게 나는 내 발로 교대에 걸어 들어갔음에도, 상당 기간 방황한다. 그렇다고 대학을 불성실하게 다닌 것은 아니다. 그 안에서 인간관계를 폭넓게 넓히거나 동아리나 과 활동 등 대학 생활을 즐기진 않았지만, 모든 수업에 나름의 최선을 다했다. 그저 내 안에서 지속적 방황이 이어졌다. 그렇게 교대의 4년이 지나고, 너무도 하기 싫었던 임용고시 공부도 딱 한 달 하고 치르는 어이없는 일도 저지른다.
교사가 된 후에도 의미 없는 방황의 시간은 문득문득 찾아왔다. 무슨 일이든 주어지면 열심히 해서 인정받길 원했던 성향인지라, 교사로서 나는 학생들에게도, 주어진 업무에도 열정을 다했다. 하지만 내 안에서는 항상 탈출을 꿈꾸고 있었다. 늘 가지 못한 길에 대해 꿈틀거리는 미련은 마흔을 바라보는 나이까지도 지속됐다. 돌이켜보면 가장 안타까운 부분이자, 아까운 시간이다. 나는 무엇보다 나의 마음에 귀 기울이고, 행동해야 했다. 결과가 어찌 되든 원하는 걸 이루기 위해 나는 노력해야만 했다. 하지만 헛된 생각과 방황에 정신 팔려 그 귀한 시간을 20년이나 보내버렸다. 눈앞에 보이는 현실에 끌려다니며 내가 진짜 원하는 모습이 아닌 다른 사람이 원하는 모습을 위해 최선을 다하며 열심히 살았다. 마흔을 앞둔 시점에 그토록 우울해지는 순간이 잦았던 이유도 결국 거기에 있던 것이었다.
내게 마흔이라는 나이는 이제 진짜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한다는 선언처럼 여겨졌다.
“넌 이제 너무 늙었어. 이제는 진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이가 된 거야. 더 이상 나라에서 인정하는 청년의 나이도 아니잖아. 이제는 새로운 것을 향해 도전하는 나이가 아니라 지금까지 노력한 것들을 거둬들이는 나이가 되어야 한다잖아. 너는 네 인생의 가을로 접어드는 거야. 그러니 이제 진짜 아무것도 할 수 없어!”
내가 마흔을 앞둔 자신에게 끊임없이 쏟아붓던 말이다. 하지만 동시에 나는 이 말들을 강하게, 온몸으로 거부하고 있었다.
“무슨 소리야. 오십 대, 육십 대 되는 분들이 들으면 코웃음 치겠다. 요즘 시대에 40이 어때서! 뭘 해도 딱 좋은 나이고만! 이제 기대 수명 200살 시대라는데! 난 뭐든 할 수 있어. 십 년 뒤에는 이 순간을 또 후회하고 있을걸? 잘 생각해 보면 30이 되었을 때도 나는 이제 안 되는 나이구나, 이젠 내 꿈을 접어야겠구나!라는 생각으로 포기했었잖아. 항상 생각에만 빠지는 게 문제야!”
결국 나는 마흔이라는 나이가 싫은 게 아니라, 마흔이라는 나이에 대해 나도 모르게 세상과 내가 만들어낸 부정적 프레임이 싫었다. 하지만 당시의 나는 그렇게 많은 것을 알지 못했다. 그저 그렇게 무기력하게 포기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은 가득 차오르는데, 정작 몸은 움직이지 않으니 점점 더 힘이 빠졌던 것 같다.
분명한 건, 나는 똑같은 삶을 그냥 그냥, 재미없이 편하게만 살고 싶지는 않았다. 이것은 진짜 마흔이 되는 준비를 시작하고 있음을 알리는 신호였다. 당장 눈앞의 많은 일들에 두렵기도 했지만, 나는 나의 모습이 49살에도 지금과 변함없이 이어지길 원하지 않았다. 그래서 찾기 시작했다. 나는 대체 뭐부터 해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