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이병을 아시나요?

<1부. 뜨겁게 앓다, 마흔의 사춘기 1>

by 하늘꽃

뜨겁게 앓다, 마흔의 사춘기

'나는 왜 '나'일까? 내가 좋아하는 것, 내가 잘하는 건 뭐지? 난 앞으로 뭘 하고 살면 좋을까? 죽으면 나는 어떻게 되는 걸까? 무엇보다, 다른 사람들도 이런 의문이 드는 걸까?'

학창 시절 배웠던 바에 따르면, 그리고 교육학 석·박사를 졸업하며 봐온 학문적 입장들을 어설프게 꺼내어봐도 이러한 질문들은 질풍노도의 시기라 불리는 10대. 즉 청소년기에 온다는 '사춘기'에 제법 어울리는 질문들이다. 그런데 나는 요즘 왜 이런 질문들에 휩싸여 있는 것일까? 이런 건 대체 뭐라고 불러야 하나? 외면해도 이런 질문이 자꾸만 나를 덮기 시작했던 마흔둘, 문득 포털 사이트에 '사춘기'라는 단어를 검색했다. 한참을 들여다본다. 두 눈이 반짝하더니, 이내 얼굴에 웃음이 번진다.

[사춘기(思春期, 영어: puberty)는 육체적, 정신적으로 어린이에서 성인이 되는 시기로서 사람마다 다르지만, 평균적으로 만 11~13세부터 시작된다. 이 시기 동안 심리적 신체적으로 큰 변화가 일어나며(... 중략... ) 심리적으로는 예민해지며 사소한 일에도 쉽게 짜증을 내기도 하고, 혼자 있고 싶어 한다든지,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 하는 것을 좋아한다. 특히 뇌 발달의 영향으로 자아가 형성된다. 이 영향으로 사춘기에 부모하고 마찰을 겪는 경우가 많다.] 출처: 위키백과

심리적으로 예민해지며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 하고, 부모와 마찰을 겪는 경우가 있다. 이런. 당시의 내 모습을 누군가 지켜보고 있다가 고스란히 적어둔 것 같았다. 이제는 인정해야겠다. 중학교 때도 오지 않았던 중2병이 모습은 비슷하게, 하지만 파급력은 더욱 무섭게 마흔이병이라는 이름으로 나에게 찾아왔고, 내 삶을 덮어버렸다. 나는 마흔의 사춘기를 앓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뜨겁게 말이다.


사회는 ‘N잡러’라는 이야기조차 이미 언제 적 이야기냐며 식상하게 여기고, 여러 책을 봐도 이제 한 사람이 하나의 직업으로 생을 마감하는 일은 불가능한 사회라고 공통되게 이야기한다. 그런데 왜 정작 우리의 부모들은, 그리고 또 다른 부모가 된 우리는 소위 ‘안정적인 직업’을 자녀 삶에 쥐어 주지 못해 안달일까?

“그래. 멋지다! 인생은 길어. 도전하면서 살아야지! 진짜 원하는 걸 하는 게 맞지! 그 정도 열정이면 해봐야지! 응원할게. 파이팅!”

이라며 다른 사람, 다른 가정의 구성원에게는 온 마음을 향해 이야기하고 환하게 웃어준다. 그러나 안정적인 직업을 던지고 떠나려는 ‘나의 자녀들이나 나의 가족에게만’은 온갖 고전적인 방법을 동원해 소위 바짓가랑이를 붙잡게 되는 게 우리의 현실이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양면적인 이 이야기들에 대한 의문인지 불만인지 모를 생각들이 나를 가득 채우는 걸 보니, 나는 마흔이병이 분명했다.


사랑받는 착한 딸이 되고 싶었고, 인정받는 사회 구성원이고 싶었다. 적당히 착한척하며, 대단히 부러움을 받는 삶을 살려했던 것 같다. 사랑받는 아내이자 매력적인 여자이고 싶었고, 완벽한 엄마이자 마음 나누는 친구 같은 존재가 되고 싶었다. 마흔이병을 앓으며 아프도록 차갑게 돌아본 내 지난 인생의 시간을 꺼내어 정리해 본 내용이다. 그리고 나는 그 문장들을 실현시키기 위해 누구보다 쉼 없이 열정적으로 달려왔건만, 그마저도 대부분 실패한 것 같은 건 웃지만은 못할 잔인한 현실이었다. 처음에는 억울한 마음이 나를 가득 채웠고, 시간이 흐르자 너무도 갑갑했다. 사랑이라는 가면을 금세 벗어던지고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괴물이 된 존재는 끊임없이 내 목을 졸랐고, 결국은 아이들까지 위협했다. 나는 온몸을 찢기고 피 흘려가며 두 아이를 품에 안고 힘겹고도 힘겹게 그 터널에서 겨우 도망쳐 나올 수 있었다. 앞으로도 말 잘 듣고 어디에 내놓아도 자랑스러운 직업을 가진, 착한 딸이면 된다는, 사랑이라는 이름 아래 지속되는 부모님의 기대와 압박은 나를 자꾸만 억눌러 숨을 쉴 수 없었다. 너무도 고맙다고, 그러니 지금처럼 그렇게 계속 죽을힘을 다해 일을 해달라며 아프다는 나에게 당연하게 요청하는 직장과 상사를 바라보며 정이 뚝 떨어지더니, 조금씩 화가 나기 시작했다. 완벽한 엄마가 되기에 몸이 하나인 나는 너무도 부족하게 느껴졌고, 삶은 힘겨워 순간순간 주저앉아 울고 싶었다. 이 모든 게 열정을 다해 살아온 나의 현재 모습이었다. 하지만 나는 주저앉아 투정 부리며 아무것도 안 하는 모습은 싫었다. 이내 마음을 다잡았다. 툴툴 털고 일어나 새로운 문을 열고 나가는 멋진 열정이 내 안에는 있었고, 그런 나를 곁에서 따스하게 바라보며 언제나 응원해 주는 두 딸이 있었다. 그렇게 힘을 냈다. 다시 일어나 상황을 파악했다. 이번에는 서두르지 않았다. 천천히, 하나씩 살폈다. 모든 일들이 일어난 진짜 원인을 찾아야만 했다. 그래야 모든 것을 바꾸고, 새롭게 시작할 수 있었다. 이제는 진짜 내 인생을 살고 싶었다.


내 마음을 살펴보아야 했을 많은 시기에 나는 항상 다른 사람들의 시선과 평가에 신경 쓰기 바빴다. 내가 원하는 내 모습은 알지 못한 채 소위 사랑받기 위해, 인정받기 위해, 다른 사람들이 원하는 나의 모습을 찾아 거짓 삶을 살기 바빴다. 온전히 타인과 사회의 모습에 기준 맞추기 위해 지금까지 애썼던 나를 확인했다. 더 놀라운 건 이 모든 것이 내 주변 사람들이나 사회의 책임이라기보다는, 결국은 “나 스스로의 가스라이팅”이었다는 것이다. 돌이켜보니 나의 자존감과 판단 능력을 잃게 만들고 고립시킨 존재는 결국 나였고, 나의 생각이었다. 나의 인생 곳곳의 모든 중요한 순간에 어떤 이유로든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원하는 선택만을 했던, 바로 ‘어리석었고 나약했던 나’였던 것이다. 한 가지 분명한 긍정적인 측면은 이전에는 생각조차 누가 혹여 눈치라도 채면 어쩌나, 이런 생각을 감히 내가 해도 되는가 싶었지만, 이제는 글로 써 내려가 흔적을 남길 만큼 건강한 마음 챙김이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나의 마음을 내가 알아채는 것”

누군가에겐 당연한 것들이 나에게는 결코 쉽지 않았고, 방법조차 몰라 마음속 방황만 했던 기간도 있었다. 그러던 내가 사람들과 찝찝함이나 어색함이 남더라도 용기 내어 내 진짜 마음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아니, 그러기 위해 노력했다. 삐걱거리기도 했고, 안 그러던 사람이 서툴게 꺼내는 진심에 얕았던 인연은 끊어지기도 했다. 지금껏 해본 게 공부라고 심리학 공부라는 것도 다양한 경로와 방법으로 해보았다. 하지만 내가 최종적으로 가장 많은 시간을 채운 것은 바로 ‘침묵’과 ‘끄적임’이었다. 나의 문제는 결국 항상 나를 온전히 들여다보지 못함에서 오는 것임을 깨달은 뒤로는 더욱 내 마음을 가만히 들여다보기 위해 연습했다. ‘내 지금 마음은 어떻지? 내가 지금 먹고 싶은 음식은 뭘까? 내가 오늘 꼭 하고 싶은 한 가지는 뭐가 있을까? 나는 잊지 않고 숨을 잘 쉬고 있나?’ 다른 사람의 시선이 신경 쓰여서가 아니라, 내가 궁금해서 시작했던 나에게 던지는 의도적인 '질문'과 생각을 기반한 ‘침묵’. 그리고 그 침묵에서 나오는 알아차림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형식 없이 그저 떠오르는 마음들을 적고자 노력했다. ‘생각’이 아닌 ‘마음’을 기록하는 건 쉽지 않았다. 자꾸만 이전의 습관들이 스멀스멀 올라왔고, 이게 나의 판단이 추가된 ‘생각’인지, 온전한 나의 ‘마음’인지 알기 위해 더 나를 바라보고자 노력했다. 그러고 보니 나는 마흔둘이 되어서야 나에게 가장 친한 친구가 되어주고 있는 것 같았다. 진짜 내 편을 만들고 있었다.


어느 날은 어릴 때부터 내가 느꼈던 행복했던 순간들을 떠올려 봤다. 칭찬받아서 행복했던, 타인의 시선과 평가로 인한 수동적 행복의 순간들 말고, 작더라도 내 마음에서 스스로 행복을 느꼈던 순간들을 떠올려 봤다. 내 취향이 전혀 고려되지 않은 언니나 다른 곳에서 물려받은 옷이 아닌, 용돈을 모아 내가 원하는 알록달록 스타일의 옷을 처음 사서 입었던 스무 살 봄! 외롭고 사랑받고 싶어서 그냥 나를 보고 웃어주고 나에게 좋다 말하던 사람이 아닌, 내 마음이 설레서 먼저 바라보고, 먼저 다가가기도 했던 첫사랑 오빠! 다른 사람이 이 메뉴를 싫어하면 어떡하지? 다른 사람이 먹고 싶은 게 있으면 어떡하지?라는 고민보다 내가 지금 뭘 먹고 싶은지 생각해서 제안하고 먹고 싶은 음식을 소중한 이들과 함께 즐겼던 첫 저녁! 주어진 일과 시간보다 먼저 여유 있게 출근했음에도 성실한 직장인이 되기 위해 아무도 시키지 않은 일들을 당겨서 하던 노력 대신, 20분의 여유 시간 동안 좋아하는 음악을 틀어놓고 좋아하는 책 읽기에 빠졌던 아침! 온몸의 뼈가 으스러지는 느낌으로 아픈데도 엄마니까 인상 쓰고, 짜증 내며 끝까지 해치워야 했던 집안일들을 그대로 두고, 오늘은 엄마가 너무 아프니까 아무것도 안 해도 될까? 하며 일단 누워 쉬던 날! 이제 나이도 있으신데, 내가 내린 결정으로 부모님이 쓰러지기라도 하면 어쩌지? 너무 마음 아파하시면 어떡하지?라는 염려 대신, 그마저도 부모님이 견뎌야 할 일임을 알고, 부모님이 내 생각보다 강한 존재임을 믿으며, “저는 이제 태어나 지금까지 살던 이 고향을 떠나겠어요!”라며 생판 모르는 지역으로 이사해 오래도록 꿈꾸던 자연 속 전원생활을 시작한 것!


때로는 작은 일상의 순간들에서 시작된 알아차림은 내 마음을 이해하고 인정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고, 하나하나의 노력과 연습이 쌓여 더 큰 결정을 하고 책임질 수 있게 되었다. 알고 보니 나는 내 마음을 알아차리고 그 일을 했을 때, 내가 내 인생을 디자인하고 실수와 수정을 반복하며 완성해갈 때, 비로소 가장 행복해지는 '한 명의 사람'이었다. 나의 선택이 실패라 하더라도, 툭툭 털고 일어날 용기도 빠르게 낼 수 있는 제법 멋진 사람이라는 것도 이제는 알게 되었다. 아무리 나를 아끼고 사랑하는, 나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 해주는 선택의 길로 간다 해도 이 세상은 호락호락하지 않기에 힘들기도 하고 때로 아프고 넘어지고, 좌절한다. 하지만 타인으로부터 영향받은 선택보다는 내 마음에서부터 나온 나의 선택이 실패라는 것에 맞서 버티고 이겨낼 용기와 힘을 내는데 더 유리하다. 그 크기나 속도의 차이는 우리의 예상보다 훨씬 크다. 무엇보다 이 세상 그 누구도 ‘나’에 대해 '나보다 더' 잘 알 수는 없다. 그렇게 나는 오늘도 마흔이병을 뜨겁게 앓으며, 가만히 나를 들여다본다. 그리고 나의 주치의로서 온전히 나에게 집중하는 시간과 그로 인한 일상 속 소소한 감사와 행복을 마흔이병의 맞춤약으로 처방한다. 내가 정의한 마흔이병은 이렇다.


[마흔이병(劘焮理炳, 영어: maturity)은 정신적으로 어른이에서 성인이 되는 시기로서 사람마다 다르지만, 평균적으로 만 39~40세부터 시작된다. 이 시기 동안 심리적으로 큰 변화가 일어나며(... 중략... ) 심리적으로는 예민해지며 사소한 일에도 쉽게 짜증을 내기도 하고, 혼자 있고 싶어 한다든지,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 하는 것을 좋아한다. 특히 뇌 발달의 영향으로 온전한 자아가 형성된다. 이 영향으로 마흔이병에 부모나 가족과 마찰을 겪는 경우가 종종 생긴다. *한자풀이: 깎을 마劘 불사를 흔焮 다스릴 이理 밝을 병炳, 끊임없이 깎아내고 열정을 불사르며 자신과 환경을 다스려 자기 인생의 밝음을 찾아가는 시기] 출처: 하늘 나무


어떠한가? 당신도 뜨겁게 앓아보고 싶지 않은가? 마흔이병은 제법 매력적이고, 꽤나 의미 있는 현상이다. 괜찮다. 마흔이병은 당신이나 당신 가족을 해치지 않는다. 두려워 말자. 외면하지 말자. 기쁘게 인정하고, 침착하게 받아들이자. 우리는 결국 자신만의 방법으로, 인생의 밝음을 찾아, 감사하며 웃게 될 것이다. 마흔이병을 뜨겁게 앓다 보면 그 모든 것이 비로소 현실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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