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뜨겁게 앓다, 마흔의 사춘기 2>
<뜨겁게 앓다, 마흔의 사춘기 1>
초등학교 6학년 때 큰 교통사고를 당했으나, 어린 마음에 비밀로 숨기는 바람에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했다. 이후 오랜 시간 날씨의 변화를 몸으로 느끼고, 조금이라도 무리한 밤이면 온몸의 통증을 느끼며 밤을 지내게 되었다. 게다가 둘째 출산 후 3일 만에 찬바람을 된통 맞은 덕에, 나의 몸 상태는 노인 수준인지 오래였다. 그런데 마흔이라는 나이를 맞이하면서는 뭔가 달랐다. 영역이 확대되었다고 해야 할까? 그 빈도나 강도가 심해졌다고 해야 할까? 그렇게 나는 본격적으로 여기저기 아프기 시작했다.
하루 종일 직장에서 누가 시키지 않아도 자체적으로 열정을 다하는 사람이었고, 나의 나약함이나 세세한 개인적인 일을 이야기하는 걸 즐기지 않았다. 그랬기에 직장에서 그 누구도 나의 저질 체력이나 신체적 고통에 대해 알지 못했다. 9시간 남짓의 직장에서 시간이 마무리되고 집에 오면 나의 모든 체력은 소진되고 없었다. 한 시간가량 시체처럼 쓰러져 말 그대로 ‘끙끙’ 혼자 앓고 난 뒤에야, 겨우 몸을 일으켜 집안일을 시작할 수 있었다. 때때로 혼자 캄캄해질 때까지 직장 건물에 갇힌 듯 남아 일을 하다 핸드폰 후레시에 의지해 퇴근하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 해진 뒤 딸들만 집에 남겨두고 싶지 않았기에 남은 일들은 모두 집으로 싸들고 왔다. 그리고 그 일들은 딸들이 잠든 뒤 다음 날로 넘어간 새벽까지 홀로 하나씩 해결했다. 그렇게 나의 일상은 오로지 열정과 불태움, 그리고 고통으로 반복되었다. 말 그대로 하루하루를 버티며 살고 있었는데, 나는 누구나 다 그렇게 살고 있는 줄 알았다. 그리고 내 의지라는 것에 힘입어, 입 밖으로 나의 인생에 있어 큰 다짐들을 가족들과 직장에 쏟아내기 몇 개월 전, 나에게 변화라는 것이 생기기 시작했다. 당시의 나는 해석하지 못했지만, 반드시 해석해야만 했던 아주 중요한 변화였다. 나의 몸이 적극적인 신호를 보내기 시작했다.
원래도 한 달에 한 번씩 찾아오는 마법이 반갑지 않았던 나였지만, 둘째를 출산한 이후에는 그 마음이 더욱 커졌었다. 양도 많아지고 무엇보다 통증이 심해서 효과 빠르다는 액상형 진통제를 들고 살아도 고통이 사그라들지 않아 얼른 폐경이 오면 좋겠다는 철없는 생각도 했다. 2020년 9월, 예정일이 되었는데도 마법은 찾아오지 않았고, 그 기간이 3개월 정도 유지되다 보니 이제 막 마흔이라는 나이를 앞두고 있는 시기였지만 슬픔이나 당혹스러움보다 내심 편하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았다. 그런데 12월이 시작되며 갑자기 피가 다시 나왔다. 처음에는 그동안 멈췄던 생리가 시작했구나 싶었고, 이래저래 일이 너무 많으니, 몸이 힘들어 나름 규칙 했던 주기가 꼬인 건가 싶었다. 오랜만에 해서인지 양도 많았고, 핏덩어리도 상당히 많았다. 며칠 고생하면 끝날 줄 알았던 생리는 그 뒤로도 열흘 넘게 지속되었고, 갈수록 양은 더 많아져 생리보다는 하혈을 한다는 표현이 더 적절했다. 직장 생활을 해야 하는데 넘치는 하혈 양에 나는 생리팬티에 생리대, 템포까지, 내가 아는 한 모든 방법으로 대비했음에도 40분을 버티지 못하는 일이 잦아졌다. 당연히 옷들은 검정으로 입고 다닐 수밖에 없었고, 옷에 새도 티가 나지 않게 몇 벌씩 겹쳐 입곤 했다. 이런 일상이 반복되니 피로도는 높아져만 갔고, 생활 자체가 불가능해져 갔다. 부모님 댁에 갔다가 엄마 앞에서 자연스레 하소연이 흘러나왔고, 왜 이리 미련하냐며 타박을 들은 뒤, 함께 동네 산부인과로 향했다. 산부인과에서는 피임약으로도 쓰이는 호르몬 약을 처방해 주셨다. 한 달 기준으로 표기된 순에 맞게 꾸준히 먹으면 멈출 거라 하셨다. 약을 먹은 지 이 주가 지났을 때쯤, 하혈 양이 조금 줄어드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다음 주가 시작되면서 다시 원래처럼, 어느 날은 원래보다 더 많은 하혈이 시작됐다. 그렇게 시작된 하혈과의 전쟁은 작은 산부인과에서 점차 상급 병원으로 이어지며 다음 해 4월까지 지속되었고, 본디 약한 빈혈이 있었던 나는 극심한 빈혈과 어지러움까지 동반돼 하루하루를 그야말로 겨우 '버텨내고' 있었다. 내 삶의 무기가 미련함이었는지 성실함이었는지 지금 생각해 보면 어이없지만, 그 상황에서도 나의 미련할 만큼 열정적인 직장 생활은 반복되고 있었다. 4월 초 결국 병원에서는 ‘소파술’이라는 자궁 내막을 긁어내는 시술을 제안했다. 몇 달 동안 호르몬 치료를 했으나 하혈이 좀처럼 잡히지 않고 원인을 찾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초음파로 봐도 자궁 내막이 두껍지 않아 하혈의 원인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현재로서는 다른 선택이 없고, 시술 후에는 원인이 무엇이든 하혈이 잡힐 거라는 의사 소견이 뒤따랐다. 그렇게 3시간의 시술이 잡혔는데, 나란 사람은 직장에 사실을 알리고도 오전 근무를 다 하고, 점심도 거른 채 시술 시간에 겨우 맞춰 병원에 들어갔다. 간단한 시술이라지만 마취에서 깨는 동안 상황을 지켜봐야 해서 저녁에 임시 입원을 하고, 밤늦게 퇴원했다. 그러고는 다음 날 아침 무거운 몸을 이끌고 나는 또 출근을 했다. 도대체 뭐가 문제였을까? 지금도 그때 상황을 떠올려 보면 이해보다는, 한숨이 먼저 나온다. 대형 수술은 아니라지만 마취까지 하는 시술을 하는데도, 하루 병가조차 권하지 않았던 관리자에 대한 원망이나 서운함이 아니다. 당시 나에게는 뭐가 그리도 중요했을까? 가 궁금한 것이다. 나를 돌보기 위한 합법적 권리조차 당당하게 입 밖으로 꺼내기는커녕, 그럴 생각조차 하지 않은 스스로가 바보 같다. 솔직히 내게 화가 났다. 내가 없으면 직장이 멈출 거라는 오만한 생각은 아니었다. 그저 내가 맡은 일을 내가 해야만 한다 생각했고, 이 정도의 아픔과 고통, 어려움은 누구나 다 겪으며 살고, 참고 있다며 매 순간 나를 다잡았다. 나는 이 모든 것을 참고 이겨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왜일까? 한없이 작고 작은 한 사람일 뿐인 나에게, 나는 어쩌면 그렇게도 모질게 대했던 걸까? 지금은 너무도 어이없지만, 그때는 그 모든 생각과 판단이 당연하다 여겼다. 그렇게 나는 나를 끝없이 낭떠러지로 몰았다. 시술 이후 혹시 모를 재발을 방지하기 위해 평소보다 4배(당시 의사 선생님께서는 일일 최대 허용 섭취량이라 하셨다)의 호르몬 처방을 일주일 동안 이어갔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드디어 끝난 줄 알았던 하혈은 정확히 시술 2주 후 다시 내게 찾아왔다. 한 달에 3주에서 4주씩 원인 모를 하혈이 지속되었다. 멈춘 날은 한 손가락으로 손꼽을 수 있을 정도에 불과했다. 병원에서도 좀처럼 원인을 알 수 없으니, 그저 “몸이 무너졌다. 몸의 면역 체계가 원인불명의 이유로 무너진 것 같다.”라는 표현의 설명만 할 뿐이었다.
몸이 자꾸만 이상하자, 조금씩 불안한 마음이 들었고 그 마음을 잠재우고자 건강검진도 해보았다. 몇 년째 나를 괴롭히던 저혈압은 여전히 경고와 재검진이 떴고, 설상가상으로 몇 년 동안 불안 불안했던 위염도 문제였다. 밥을 먹으면 속이 울렁거리다 토하거나, 소화가 안 돼 괴롭거나, 속이 쓰려 방바닥을 긁고 다니기, 이 셋 중 하나였다. 유방외과에서 처음으로 경고와 재검진 알림이 왔다. 하혈로 인해 오랜 호르몬 치료가 지속되면서 유방 쪽으로 문제가 될 수 있다 사전에 안내받았었지만, 막상 유방외과에서 이상 소견으로 ‘재검진과 초음파 검사 필요’라는 통보를 들으니 무서웠다. 몇 주에 한 번씩 극심한 두통에 시달리며 이유 모르게 지속적인 구토와 어지럼증이 동반되었다. 밤마다 몰려오는 온몸의 통증은 날이 갈수록 극심해졌다. 비타민 D 이상 결핍증이 문제라고, 주사 처방을 받기도 하고, 피 같은 액상형 약을 내 입에 끝없이 들이부어야만 했다. 하루가 더해질수록 내가 가야 하는 병원 진료과가 늘어났고, 검사가 많아졌다. 하지만 그 어느 과에서도 이렇다 할 명확한 원인을 찾지 못했다. 원인을 모르니 이런저런 약들이 추가됐고, 좀처럼 나아짐은 없었다. 어느 날은 아침에 일어나 출근길에 운전하는데 왼손 새끼손가락에 감각이 없더니, 이내 왼팔이 거짓말처럼 움직여지지 않았다. 겨우 차를 세워 주차했다. 그대로 직장에 연락하고, 병원으로 향했다. MRI에 CT까지 찍었다. 하루 종일 검사에 검사가 이어졌다. 작은 문제는 있었으나, 마비까지 오는 정확한 원인을 찾지 못하겠다 했다. 면역력이 저하돼서 몸에 문제가 생긴 것일 수 있다 했다. 팔의 감각은 이내 돌아왔지만, 감각 없는 새끼손가락은 몇 주 동안 약 처방과 주기적 재활치료를 받아야 했다. 하... 그놈의 면역력 저하. 원인불명. 답답했다. 명확하게 원인을 못 찾으니 더 짜증스러웠다.
그렇게 7월이 되니, 나도 이제는 진짜 살 수가 없구나 싶었다. 그제야 미련한 나는 모든 걸 좀 내려놓아야겠다고 생각한다. 직장에서 맡고 있던 직책들을 내려놓겠다 했다. 몸이 너무 안 좋다고, 인사에 높은 점수를 받을 수 있는 직책들을 내려놓아야 맘 편히 나를 돌보며 평범한 직장 생활이 가능할 것 같다 말했다. 치료와 쉼이 필요하다 설명했다.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원망이었다. 몇 년 동안 나를 희생하며 일했지만, 직장과 상사는 그에 대한 고마움이나 배려를 길게 보이지는 않았다. 오히려 앞으로 그렇게 하지 않을 거라는 예상에, 처음에는 부탁하더니 건강의 문제로 이를 계속 거절하자, 불편한 내색을 넘어 결국 원망과 불평을 늘어놓았다. 그 순간 나는 현실을 정확히 보았다. 그동안 내가 얼마나 바보같이 살았는지 그제야 깨달았다. 그렇게 어리석고 어리석은 나였다. 나는 나 스스로를 지키거나 챙기지 않았다. 살면서 가장 기본이었어야 하는 그것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몸은 내게 오랫동안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너는 지금 힘이 들다고, 지금은 조금이라도 쉬어야 할 때라고. 하지만 내 생각이라는 것은 나를 늘 밀어붙였다. 누구나 다 힘들다고, 너는 엄마니까, 너는 두 아이를 홀로 지키고 키워야 하니까, 이런 일쯤은 당연히 이겨내야 한다고 했다. 너는 자랑스러운 딸이 되어야 하니까, 이런 일들은 웃으며 이겨내야 한다 했다. 너는 능력 있는 사람이고 그래야 하니까, 이런 일들은 모두 감사하며 즐겁게 받아 열정을 다해야 한다고, YES MAN이 오직 나의 운명이라 믿었다. 그 누구도 내게 해서는 안 되는 그런 말도 안 되는 압박을, 나 스스로 나에게 주고 있었다.
마흔이 다가오면서 나는 여기저기 아프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것은 단순히 아픔이나 질병이 문제가 아니었다. 내 몸이 나에게 긴급 구조 신호를 보내고 있는 것이었다. 삐오삐오! 이제 그만, 정신 차리라고! 그러다 진짜 큰일 난다고! 그러다 진짜 후회한다고! 그러다 진짜 그렇게 인생 마감할 거라고. 심각하고 진지하게 긴급 구조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결국 나는 홀로 병상에 누운 뒤에야, 그 신호를 조금씩 해석하고 있었다.
당신은 어떠한가? 매일의 일상에 치여, 눈앞의 성과에 가려져, 가족을 지키겠다는 영웅심리에 빠져, 정작 중요한 스스로를 뒤로하고 있지는 않은가? 요즘 들어 부쩍 잠을 이루지 못한다면, 최근 들어 부쩍 여기저기 아프기 시작했다면 멈추고 잘 살펴야 한다. 내가 괜찮은지 확인해야 한다. 우리 몸이 보내는 긴급 구조 신호는 생각보다 길지 않을 수 있음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무엇보다 나 스스로를 챙기지 못한다면, 나는 그 어떤 것도 할 수 없는 나약하고 안쓰러운 한 사람이다. 우리는 가장 중요한 것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잊지 않아야 한다.
나는 때로는 쉼이 필요하고, 돌봄도 필요한, 한 명의 사람이다.
당신도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