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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an Feb 11. 2022

현서야, 넌 왜 자아가 있니?

내가 되고 싶은 나와 실존하는 나, 그 균형감에 대하여.

  오늘은 나의 여러 자아 중 두 가지에 관해 말해보려 한다. 제1 자아는 작가 지망생, 제2 자아는 주얼리 포장 아르바이트생이다. 내가 ‘나 자신’을 인식하게 된 것은 2018년 1월 경이었다. 두 번째 직장에서 퇴사한 직후였다. 추운 겨울, 부장님은 계약 종료와 동시에 나를 잘랐고, 나는 그 당시 제1 자아였던 회사원으로서의 나를 잃었다.      

  

  그 당시 나의 중심 자아이기도 했던 직장인의 나는 ‘약삭 바르지 못하고, 눈치 없고, 사회생활 못하는 어수룩함의 극치’이기도 했다. 어벙함의 최고조를 달리던 그때에 신께서는 내가 불쌍해 견딜 수 없으셨는지 내게 나 자신을 발견할 수 있는 기회를 선물해주셨다. 내게 ‘꿈’을 꿀 공백기를 주신 것이다.      

   

  4개월의 쉼표 기간 동안 나는 나 자신이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를 끊임없이 생각했다. 결론은 애매하면서도 분명했다. 나는 창조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돈은 먹고 살만큼, 책을 실컷 살만큼, 병든 나와 가족을 치료할 수 있는 만큼만 벌면 되고, 나머지는 나를 위해 투자하면서, 좋아하는 글을 쓰면서, 살고 싶다.      

  

  나름의 자아실현을 하겠다 싶은 마음으로 돈은 딱 생활비를 벌만큼만 벌었다. 고객센터에서 정확히 하루에 8시간만 근무하고, 나머지는 내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자아실현을 위해서는 내 시간이 더 필요하다고 느껴졌을 때 나는 회사를 그만두었다. 완전한 백수가 된 나는 매월 생활비를 벌기 위해 디지털 노매드를 꿈꾸며 재택알바를 시작했다. 그러나 차라리 출퇴근하는 것이 더 쉽다고 느껴질 만큼 업무의 양은 과도했고, 나는 두 손 두발을 들고 계약 종료를 고했다.      


  지금의 생활은 나름의 안정을 찾아갈 수 있을 정도, 나만의 최선의 방법을 도입한 시스템으로 월~금 하루 5시간의 노동을 하고 있는 중이다. 생체 시스템도 아예 손 발을 움직이지 않는 것은 원하지 않는 것 같았기에, 나는 출퇴근하는 삶을 다시 선택했다.      

우선, 재택근무를 하면 늦잠이 가능해져서 하루의 출발이 늦어지고, 그러면 전체적인 생활 밸런스가 무너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에 따라 그날의 기분, 글 쓰는 체력, 화장실 가는 리듬이 전부 망가져서 하루도 망치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나는 나의 균형점을 찾기 위해 다시 일을 시작했다.     



 

  아르바이트도 직장생활이기 때문에 내 ‘자아’와 타인의 ‘자아’가 부딪힐 때가 있다.  포장 알바를 처음 접했을 때 2-3주 동안은 회사 직원의 말이 법인 양 고분고분 잘 따랐다. 이거 하라면 이거 하고, 저거 하라면 저거 하고. 내 생각 자체가 없었다. 이렇게 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틀렸다고 생각했다. 실수가 발생해서는 안됐고, 일처리가 늦어지면 안 된다는 생각으로 가르쳐 주신 것들을 머릿속에 욱여넣느라 바빴다.     

  한 달이 지나자 이제 일에 자신감이 붙고 어떻게 해야 할지가 그려졌다. 그래서 이렇게 하세요, 에 대한 반기와 저항심이 마음속에 생겨났다. 저렇게 하면 더 번거로울 텐데. 그건 아닌데. 말을 저런 식으로 할까? 기분 나쁘게. 이런 식으로 부정적인 생각들이 내 마음을 파고들었다. 그런 생각들은 마치 병균 과도 같아서 삽시간에 ‘착한 나’를 잡아먹고, ‘고분고분한 나’를 꼬드겨 나의 안정을 추구하던 ‘마음’의 자리를 자기가 주인인 냥 차지해가고 있었다.     


  이를테면, 내게도 자아가 생긴 것이다. 생후 15개월-24개월 경부터 아기는 자신과 세계를 구분할 줄 알고, 자신의 것을 주장하기 시작한다고 한다. 이것처럼 나에게도 자아가 생겨나고 있었다. 이제는 내 뜻대로 일을 해도 이제 거리낄 것이 없을 만큼 업무는 수월했고, 직원들이 무슨 말을 하면 무슨 의도로 하는지도 대충 파악 가능했다. 그렇게 술술 잘 풀려가고 있다고 생각할 때 쯔음 사건이 발생했다.     


“현서 씨, 이거 한 번도 안 해보셨어요? 가르쳐드리지 않았나요?”


직원이 나에게 물었다. 바쁜 상황에서 자신의 의도대로 뭔가가 되지 않았는지 잔뜩 미간이 찌푸려진 채로 나를 바라봤다. 나는 당황한 나머지 말을 얼버무렸다.     


“아... 해보긴 했는데, 뭔가 잘못됐나요?”     
“순서도 완전 반대로 되어 있고, 구분도 잘 안되어 있어서요. 이거 안 해보신 거 아니에요? 왜 이렇게 하셨어요?”     
“아... 해봤는데... 구분을 해 놨어야 하는군요.”  
   

  나는 이제껏 그 업무를 했을 때 종류대로 구분을 해서 드린 적이 없었다. 그렇게 드렸어도 다른 직원분은 아무 말씀 없으셨고, 잘못된 것이 없는 줄 알았다. 그러나 그렇게 드리면 안 되는 거였나 보다. 직원은 한 숨을 계속 쉬며 일을 했고, 나는 얼굴이 화끈거려 애꿎은 포장박스만 만질 뿐이었다.  


             


“긴 말 안 할게 기사 올려.”

“못 올립니다.”

“명령에 왜 선택을 해,...... 너한테 그게 왜 생겼지?”

<검색어를 입력하세요. WWW> #DIGGL   





이전의 나라면 명령이 바뀌었으니 그대로 이행하면 될 일이었다. 하지만 그게 불편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누군가에게 혼나는 상황은 정확히 5년 전에 경험했던 것과 비슷했다. 사무실 직원들이 다 보는 앞에서 30분 내내 날 세워놓고 혼냈던 과장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인신공격과 무차별한 언어폭력 앞에서 나는 고개를 숙이고 죄송합니만 연신 되풀이했다. 그리고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지금까지 그렇게 드렸는데, 아무 말 없으셨잖아요. 말씀해주셨으면 그렇게 드렸죠.”     

     

  이 말을 하고 싶어서 목구멍까지 말이 차 올랐지만, 차마 말을 하지 못했다. 해야 했지만 하지 못한 것을 후회하며 퇴근길에서도 스스로 자책했다. 그건 변명이 아니라 마땅히 했어야 하는 말이라고. 네 잘못인 거라고. 스스로를 다그쳤다.      


‘시간이 흘렀어도 약한 너는 변하질 않아. 너 자신은 그대로야. 강해지긴 글렀다.’     


  회피하는 나, 말해야 할 것을 하지 못해 끙끙 앓는 나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아니 주된 자아로 여전히 나를 정복하고 있었다. 우습게도 나는 그런 사람이다. 변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자신감 있는 나를 꿈꾸며 상상 속에서 위로를 받는다. 상상은 말 그대로 상상일 뿐 현실 속 나는 직원의 말에 ‘순응’하며 ‘복종’한다.   



   

반동형성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반동형성(反動形成, reaction formation)이란, 불안을 유발하거나 수용되지 못할 감정 혹은 욕구 충동에 대하여, 그것과 정반대 되는 경향을 과장되게 만들어냄으로써 이를 억제하는 방어기제를 말한다.  

         

  직원의 말의 기저에는 ‘가르쳐줬는데 왜 그걸 무시하고, 네 마음대로 해? 아님 '처음 해 보는 거라고 말하기만 해. 저번에 네가 했던 거 난 기억하니 바로 공격해주겠어.’라는 공격성이 포함되어 있는 듯했다.      

나는 그 공격성을 그대로 흡수해서 같이 응수하며 ‘그럼 가르쳐줄 때 제대로 가르쳐줬어야지, 이제 와서 짜증이야. 신경질 나게. 너 혼자 바쁘냐? 나도 바빠.’라고 해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반응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와는 정반대로 행동했다.  나는 앞으로 그렇게 하겠다는 의미로 알겠다고 대답했고, 대화는 그렇게 끝이 났다.


"배려(solicitude)는 잔혹성(cruelty)의 반동형성, 결벽(cleanliness)은 호분증(好糞症, coprophilia)의 반동 형성일 수 있다."

참고문헌 Charles Rycroft, A Critical Dictionary of Psychoanalysis (London, 2nd Edn, 1995)     


"높은 덕성과 선량은 그에 부응하며 살아가고자 하는 가치가 아니라, 원초적 대상(primitive object) 카텍시스(cathexis, 혹은 심적 부착, 리비도나 심적 에너지 등이 어떤 대상에 집중되는 형상)의 반동형성일 수 있다. 순결(chastity)과 순수(purity)에 대한 로맨틱한 생각은 정제되지 못한 성적 욕구(crude sexual desire)를 가리고 있으며, 이타주의(altruism)는 이기심(selfishness)을 가리고 있을 수 있다. 또한 경건함(piety)은 죄(sinfulness)를 가릴 수 있다."

참고문헌 Calvin S. Hall, A Primer of Freudian Psychology (New York, 1954)


  나의 방어기제는 ‘복종’으로 나타났다. ‘저항’하고 싶은 마음이 ‘복종’으로 바뀌다니 참으로 애석한 일이 아닌가. 내 마음은 한 번도 내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는다. 결정적인 순간마다 나를 참 별로인 사람으로 만들어놓고 절망에 빠지게 한다. 제2의 자아인 ‘아르바이트생’은 연약하고 불완전하다.      


  그렇다면 제1의 자아인 ‘작가 지망생’은 어떤가. 하루는 ‘허세’에 빠져 ‘나 잘란 맛’에 심취해 있고, 하루는 ‘욕구불만’ 상태로 신경질적 성질을 보인다. 브런치의 조회수가 폭등하는 날은 역시 내가 트렌드를 잘 읽어서, 내 글이 재밌어서 이만큼이나 했다는 잘난 척으로 어깨에 뽕들어간 듯 가족에게 자랑을 한다. 그리고, 조회수가 주춤하거나 폭락하는 경우, 구독자 수가 줄어들기라도 하는 날이면 금세 의기소침해져서 내 글의 효용성을 따져가며 내 작품을 폄훼하고 헐뜯기 시작한다. 끝도 없는 자기비판에 빠져 급기야는 신경질적 증세를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내 글을 세상이 알아주지 않는다며 세상에 대한 작은 폭력성을 띠기도 하는데, 그렇기에 내 힘은 너무 작고 미미하기에 금방 수그러들고 만다. 기껏 해봐야 ‘너무해.’ 정도다.      


  이러한 욕구불만을 해결하기 위해 나는 욕구불만 내성을 기를 필요가 있다.      

욕구불만 내성(frustration tolerance)이란 어려운 과업에 직면할 때 좌절하는 것을 막는 능력을 말한다. 낮은 욕구불만 내성(low frustration tolerance)은 특성 분노(trait anger)와 관련되어 있고, 내성이 높으면 분노 수준이 낮고 과업에 대한 인내(persistence)가 더 오래간다. 예를 들어, 욕구불만 내성이 높은 아이는 유의미한 욕구불만 경험 없이도 거듭하는 장애나 실패를 대처할 능력이 있다. 반대로 내성이 낮은 아이는 보통 수준의 어려움을 갖는 과제들을 수행하라는 지시를 받았을 때, 좌절을 빨리 경험할 수 있다.

Liden, C. (February 2011). “9 Traits You Should Know About Your Temperament”. 《Behaviour Research and Therapy》 49 (2): 114–119. doi:10.1016/j.brat.2010.11.011     


  욕구불만을 대처하는 방식은 수동적-공격적 행동(passive–aggressive behavior), 분노(anger), 폭력(violence) 등 다양하다. 그러나 욕구불만은 어떤 일에 대한 노력(effort)이나 분투(strive)를 돋우는 방식으로 긍정적인 처리 방식을 유도하기도 한다.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나는 제1의 자아를 실현하기 위해서 지금 자리에 앉아 글을 쓴다. 내 나름의 고군분투다. 좋은 글을 쓰기 위해 노력하며 발전하려 애쓴다. 하지만 이것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 장담은 하지 못한다. 그저 운이 좋아 책 한 권 출판하기를 바랄 뿐이다.      


  내 주된 자아들은 그리 건강해 보이진 않지만 그래도 나 자신들이니 만큼 끝까지 안고 가야 한다. 아픈 손가락들이지만 어쩌겠는가. 내가 나 자신을 인식하는 한 이들의 존재도 함께 갈 것이다. 제발 부디 서로 사이좋게 지내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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