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쓰러지려 할 때 나를 잡고 버텨주는 사람들
2월 13일 일요일, 카페에서 지인을 만났고, 수요일 지인의 코로나 확진 소식을 전해 들었다.
나는 화요일 오후부터 두통, 발열, 무기력함, 피곤함의 증상들을 겪었는데, 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평소 두통을 달고 사는 나였고, 안 하던 아르바이트까지 병행하다 보니 체력이 바닥났을 뿐이라고 여겼다.
대망의 수요일, 지인이 코로나에 걸렸다는 말을 듣고, 나의 그 증상들이 코로나 증상과 매우 흡사하다는 생각이 들자, 불안감으로 인한 식은땀이 났다. 그리고, 자가진단키트로 검사를 해봤다.
결과는 음성이었다. 안심하고, 감기약을 먹고, 타이레놀을 먹었다. 자고 일어나니 좀 나아졌다 싶다가 다시 아팠다. 다시 자가진단키트로 검사를 했고, 음성이 나왔다. 그래도 불안했다. 단순 몸살과는 좀 다른 느낌이었다. 살고 싶지 않은 무기력함이었다. 그냥 이대로 생이 끝나도 아무렇지 않을 것 같은 우울함이 동반되었다.
보건소에서 받을 수 있다던 밀접접촉자 pcr 검사 문자는 오지 않았고, 나는 pcr 대상자로 구분되지 못해 결국 신속항원검사를 받았다.
사실상 신속항원검사는 자가진단키트와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내가 직접 검체를 하고, 시약에 검체를 담그고 테스터기에 그것을 몇 방울 떨어뜨리고 의료진에게 전달해주는 것이 전부였다. 결과도 음성이 나왔다. 회사에는 결과가 음성이 나왔다고 알려주었으나, 회사로써도 나도 그 결과를 100% 신뢰할 수는 없었다.
서로가 다행이라는 말속에 애써 감추었던 그 무언가가 건드려질까 봐 조심스러워하는 분위기였다. 과연 그 결과가 정확한 결과값인가에 대한 의문이었다. 기사에서는 신속항원검사의 민감도는 50 정도라고 한다. 이 50이라는 수치도 전문 의료진이 했을 때의 수치이고, 양성을 양성으로 판별하는 것의 정확도가 50대 50이라는 의미다.
이 검사를 일반인이 했을 경우는 그 정확성이 더 떨어져서 20 정도라고 한다. 그러니 내가 집에서 아무리 자가진단키트를 자주 해도 가짜 음성이 나올 확률이 높다는 말이 된다. 그 말을 받아들이자 무력감이 찾아왔다. 나는 pcr도 못 받고, 이렇게 코로나가 걸렸는지도 확실하게 알지 못한 채 죽어갈 수도 있겠다는 좌절감이었다.
마스크를 써서 그런지 알 수 없었으나 숨을 쉬는 것이 힘들었고, 조금 달렸을 뿐인데도 과호흡이 와서 쓰러질 것처럼 숨이 가빠 정신이 아득해졌다. 이대로 정신을 잃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마디로 무서웠다. 장난으로라도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는데, 정말 진심이 아니라는 걸 오늘 알게 되었다. 지금 글을 쓰고 있는 순간에도 과호흡이 왔던 그 순간이 생각나서 갑자기 숨을 쉬기 힘들어진다.
코로나 검사가 음성이 나와도 나는 안심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집에서든 회사에서든 마스크를 벗지 않고, 생활한다. 우리 집 안방에 내 살림을 차려놔서 밥도 여기서 먹고, 화장실도 나 혼자 쓰고 있다. 그러다 보니 가족들에게 미안하기도 하고, 스스로가 불쌍해 보이기도 한다.
주말에 정했던 약속들은 모두 취소를 했다. 친구가 전화를 와서 내 상황을 다시 물어보며 걱정스레 안부를 묻는다. 나는 장난 반 진담 반으로 자다가 죽을까 봐 걱정된다고 말했다. 이 말을 하면서 나의 장례식을 한번 생각해보다가 정말 먼 일이 아닐 것 같다는 실없는 생각을 했다. 친구는 두서없는 내 말을 찬찬히 들어주며, 맞장구를 쳐주고, 긴 호흡의 이야기를 성의 있게 잘 들어주었다.
총 통화시간 1시간. 거의 내 말만 한 것 같은데 불평 어린 내 호소와 투정을 짜증 한 번 없이 잘 다독여주었다. 몸살 기운이 있고, 몽롱한 가운데 내뱉은 내 말이 논리적이고 두서가 잘 잡혀있을 리 만무했지만 친구는 재촉하거나 다그치거나, 화를 내지도 않고, 위로해주며 나를 이해해주려 애썼다. 그래서인지 더 속 깊은 이야기를 꺼낼 수 있었고, 슬프고 우울하고 짜증 나고 화나는 알맹이의 것들을 모두 끄집어낼 수 있었던 것 같다.
친구와 전화통화를 끝내고, 나는 알 수 없는 감정에 휩싸였다. 내가 만약 친구의 입장이었다면, 이렇게 잘 들어줄 수 있었을까? 나는 위로를 잘하는 성격이었던가? 참고, 들어주는 사람이었던가? 내가 힘들 때 내 곁을 지켜주는 친구들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
들은 내가 있어서 정말 힘이 되고 있을까? 어려울 때마다 전화하는 사람이 정해져 있듯 우리는 살면서 때때로 사람들에게 기대며 산다. 나는 남들이 기댈 수 있을 만한 사람이었던 가 반성해보게 된다. 코로나 시대를 살면서 자주 볼 수 없는 얼굴들을 떠올리며 친구들의 안부를 물어봐야겠다.
잘 지내고 있는지, 별일은 없는지. 나의 경우가 그렇듯 무소식이 꼭 희소식이라는 보장은 없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