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회사 망하겠구나’ 직감했던 결정적 순간들

퇴사자의 솔직한 회고록

by 구매가 체질

이력서에 차마 다 담지 못하는 경력이 있습니다.


바로 ‘망해가는 회사에서 버텨본 경험’입니다. 화려한 투자 유치 소식과 대표의 자신감 넘치는 인터뷰 뒤에서, 조직이 서서히 썩어가는 냄새를 맡았던 순간들이 있었습니다. 그 냄새는 재무제표나 데이터 지표가 아닌, 아주 사소하고 일상적인 풍경에서부터 피어올랐습니다.


오늘은 이론적인 분석이 아닌, 제 살갗에 남은 흉터 같은 이야기들을 꺼내볼까 합니다. 제가 지난 커리어에서 “아, 이 배는 가라앉고 있구나”라고 직감했던 결정적 순간들입니다. 혹시 당신의 회사에도 이런 장면들이 스쳐 지나간다면, 진지하게 탈출을 고민해봐야 할 때일지도 모릅니다.


1. 천재 대표의 ‘오늘의 아이디어’가 모두의 ‘내일의 재앙’이 될 때


제가 겪었던 한 대표님은 어리지만 정말 똑똑한 분이었습니다. 자사고에 명문대, 해외 유명대학 박사학위까지. 누가 봐도 평생 천재 소리만 들으며 살았을 것 같은 사람이었죠. 시장을 읽는 눈, 새로운 기술에 대한 통찰력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진짜 문제는, 그의 머릿속에서 ‘세상을 바꿀 아이디어’가 마르지 않는 샘처럼 매일같이 솟아난다는 점이었습니다. 그에게 어제의 아이디어는 오늘의 낡은 것이 되기 일쑤였죠.


어느 월요일 아침, 그는 갑자기 전 직원을 모아놓고 선언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지난 3개월간 준비하던 A 프로젝트는 모두 중단합니다. 제가 주말 동안 엄청난 기회를 발견했습니다. 오늘부터 우리는 B를 시작합니다!”


팀원들의 얼굴에는 기쁨 대신 황당함과 허탈함이 가득했습니다. A 프로젝트를 위해 수많은 밤을 새웠던 개발자, 어렵게 영업처를 뚫어놓은 사업개발팀, 이제 막 마케팅 계획을 완성한 마케터까지. 모두의 노력이 한순간에 쓰레기통으로 던져졌습니다. 더 무서운 것은, 이런 일이 처음이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한 달 뒤, B는 C에게 자리를 내주었고, 우리는 ‘대표의 아이디어를 구현하는 단기 외주팀’으로 전락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화려한 이력서에는 수많은 '시도'들이 남겠지만, 팀원들에게는 '미완성'의 상처와 허탈감만 남는 구조였습니다.


만약 당신의 회사에서 이런 장면이 떠오른다면:

리더의 즉흥적인 지시 한마디에 장기 프로젝트의 방향이 수시로 바뀐다.

“왜 이걸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일단 해보면 알아” 혹은 “내가 해봤는데 이게 맞아”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성공적으로 완수한 프로젝트보다, 시작만 하고 흐지부지 사라진 프로젝트가 더 많다.


2. ‘만드는 사람’은 없고 ‘보고를 위한 보고’만 남았을 때


회사가 조금씩 커지면서 이상한 사람들이 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제품을 만들거나 고객을 만나지 않았습니다. 대신, 온종일 회의실에 앉아 파워포인트(PPT)만 만들었죠. 제가 다녔던 한 회사는 ‘내부 보고’가 가장 중요한 업무가 되어버린 곳이었습니다.


실무자들이 고객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동안, 소위 ‘전략팀’이나 ‘기획팀’ 소속의 사람들은 현란한 그래프와 시장 분석 자료로 가득 찬 50장짜리 보고서를 만드는 데 시간을 쏟았습니다. 정작 그 보고서의 내용은 현업의 이야기와는 동떨어진, 뜬구름 잡는 이야기뿐이었습니다.


결정적으로 ‘망했다’고 느낀 순간은, 한 주간 회의에서 실제 제품 데모는 5분 만에 끝나고, 그 제품을 ‘어떻게 보고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를 2시간 동안 했을 때입니다. 만드는 사람의 목소리는 작아지고, 그것을 포장하고 보고하는 사람의 목소리가 커지는 순간, 회사의 심장은 멈추기 시작합니다.


만약 당신의 회사에서 이런 장면이 떠오른다면:

실무보다 문서를 꾸미는 데 더 많은 시간을 쓴다.

내부 보고를 위한 회의가 고객을 위한 회의보다 훨씬 많고 길다.

실질적인 성과가 없는 사람이 현란한 말솜씨와 보고서만으로 능력을 인정받는다.


3. 똑똑한 동료들이 하나둘씩 ‘바보’가 되어갈 때


제가 입사했던 이유 중 하나는 정말 배울 점이 많은 동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던 개발자, 데이터로 모두를 설득하던 마케터, 고객의 마음을 꿰뚫던 기획자.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그들의 눈빛이 흐려지기 시작했습니다.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도 “그거 위에 보고하면 어차피 안 될 거야”라며 지레 포기하고, 비합리적인 지시에도 “원래 그런가 보다”라며 순응했습니다. 회의 시간에는 아무도 질문하지 않았고, 침묵만이 길어졌습니다. 똑똑했던 사람들을 바보로 만드는 시스템 속에서, 열정은 냉소로, 에너지는 무기력으로 변해가고 있었습니다.

가장 아팠던 순간은, 제가 가장 존경하던 동료가 퇴사하며 “여기서는 더 이상 성장하는 게 아니라, 닳아 없어지는 기분이야”라고 말했을 때입니다. 인재를 품지 못하고 오히려 갉아먹는 회사는, 서서히 말라가는 고목나무와 같습니다.


만약 당신의 회사에서 이런 장면이 떠오른다면:

핵심 인재, 특히 모두가 인정하던 ‘에이스’들이 조용히 퇴사한다.

예전에는 활발했던 동료들이 눈에 띄게 수동적으로 변하고, 회사 일에 대한 불평만 늘어놓는다.

새로운 시도나 도전을 응원하기보다, “괜히 일 만들지 말자”는 분위기가 팽배하다.


4. ‘우리’라는 단어가 사라지고 ‘네 탓’만 남았을 때


초기 스타트업의 가장 큰 무기는 ‘우리’라는 끈끈함입니다. 내 일, 네 일 가리지 않고 서로의 부족함을 메꿔주며 문제를 해결하죠. 하지만 회사가 망가지는 신호는 책임 전가가 시작될 때 나타납니다.


제가 있던 곳에서는 프로젝트가 실패하자 거대한 ‘네 탓 게임’이 시작됐습니다. 개발팀은 기획팀의 기획서가 부실했다고 말했고, 기획팀은 개발팀이 제대로 구현하지 못했다고 맞받아쳤습니다. 마케팅팀은 제품에 문제가 있어 팔 수 없었다고 항변했습니다.


어제의 ‘우리’는 온데간데없고, 자신의 안위를 위해 동료를 방패 삼는 사람들만 남았습니다. 문제의 원인을 찾아 해결하는 대신, 책임질 희생양을 찾는 데 혈안이 된 조직에 미래는 없습니다.


만약 당신의 회사에서 이런 장면이 떠오른다면:

문제가 생겼을 때 ‘어떻게 해결할까?’를 논의하기보다 ‘누구 책임이야?’를 먼저 따진다.

팀 간에 서로를 돕는 것이 아니라, 정보를 숨기고 견제하며 미묘한 신경전을 벌인다.

성과가 좋을 땐 리더의 공, 성과가 나쁠 땐 실무자의 탓으로 돌아간다.


이 글을 읽으며 마음이 불편했다면, 어쩌면 당신은 이미 그 신호들을 몸으로 느끼고 있기 때문일 겁니다. 부디 당신의 소중한 열정과 시간이, 가라앉는 배와 함께 수장되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때로는 과감하게 뛰어내리는 용기가 가장 현명한 선택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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