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PI라는 이름의 은유에 대하여
가렛 하딘이 '공유지의 비극'을 설파했을 때, 그것은 단순한 경제 모델이 아니라 인간 본성에 대한 하나의 '선고'였다. 타인의 안녕보다 자신의 이익을 앞세우는 목동들의 이야기는 현대 기업 경영의 근간인 성과 평가(KPI) 시스템으로 고스란히 전이되었다. 우리는 매년 숫자로 박제된 목표 앞에 서며, 그 숫자가 조직의 안녕을 보장할 것이라 믿는다.
하지만 수전 손택이 사진에 대해 말했듯, 무언가를 포착하려는 행위는 동시에 무언가를 소멸시킨다. 우리가 성과를 숫자로 '촬영'하려 할 때, 그 숫자에 담기지 못한 살아있는 협력과 신뢰의 서사는 소멸의 길을 걷는다.
현대 경영은 '측정할 수 없는 것은 관리할 수 없다'는 신화를 숭배한다. 이 신화 속에서 KPI는 조직의 상태를 투시하는 엑스레이처럼 여겨지지만, 실상은 파편화된 진실만을 보여주는 정지 화면에 가깝다. SCM 현장에서 마주하는 재고 회전율이나 원가 절감률 같은 지표들은 그 자체로 유의미하지만, 그것이 '개인'의 성과로 전유되는 순간 비극이 시작된다.
자신의 목초지만을 살찌우려는 목동처럼, 부서 이기주의는 숫자를 조작하고 정보를 독점하며 시스템 전체의 붕괴를 방조한다. 하딘의 예언대로라면, 우리에게 남은 선택지는 국가(중앙 통제)의 서슬 퍼런 칼날이거나, 모든 것을 쪼개어 소유하는 사유화뿐이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2002년 미국 국립연구회(NRC)가 던진 질문을 다시 되새겨야 한다. 과연 이것은 필연적인 비극인가, 아니면 우리가 아직 완성하지 못한 '드라마'인가.
엘리너 오스트롬과 그녀의 동료들이 제안한 '공유의 드라마'는 결정론적 절망에 대한 우아한 반박이다. 드라마에는 각본이 있고 배우가 있으며, 무엇보다 '선택'이 존재한다. 공유 자원을 관리하는 이들이 단순히 이기적 욕망에 매몰된 기계가 아니라, 신뢰와 호혜성을 바탕으로 제도를 진화시키는 주체임을 입증한 것이다.
회사의 성과 관리 역시 이와 같아야 한다. KPI는 개인을 가두는 창살이 아니라, 공동의 드라마를 끌어가기 위한 '대사'가 되어야 한다. 수치가 조금 부족하더라도 전체 시스템의 흐름을 읽고 협력하는 행위(이타적 처벌과 호혜성)가 인정받는 구조, 즉 '제도적 다양성'이 확보될 때 조직은 비극의 굴레를 벗어던질 수 있다.
실무자로서 내가 목격한 진실은 진정한 공급망 관리는 물류의 이동이 아니라 '신뢰의 이동'이다. 내가 몸담은 산업에서, 숫자로 환원되지 않는 연구원들의 헌신과 구매 담당자의 직관은 지표라는 협소한 틀을 늘 비집고 나온다.
우리가 성과 지표를 설계할 때 범하는 가장 큰 오류는 그것을 '결과'라고 믿는 데 있다. 하지만 지표는 과정 중에 끊임없이 수정되고 학습되어야 하는 '적응형 관리'의 도구일 뿐이다. 제임스 윌슨이 강조했듯, 자연은 선형적이지 않으며 인간의 제도 또한 자연의 불확실성에 맞춰 유연하게 춤을 추어야 한다.
수전 손택은 고통받는 타인의 얼굴을 보며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물었다.
나는 묻고 싶다.
우리는 KPI라는 숫자의 이면에 숨겨진 동료들의 고군분투를 보고 있는가? 아니면 그저 모니터에 박힌 차가운 픽셀만을 숭배하고 있는가?
조직은 죽은 숫자의 합이 아니라 살아있는 인간들의 상호작용이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성과 관리는 비극적 파멸을 막기 위한 감시 체계가 아니라, 더 나은 협력의 희극을 써 내려가기 위한 풍부한 거버넌스의 장이 되어야 한다.
비극은 필연이 아니다.
우리가 제도를 어떻게 설계하느냐에 따라, 우리 조직의 이야기는 비로소 찬란한 드라마로 완성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