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만의 만남
까마득한 세월 속에서도 또렷이 남아 있는 장면들이 있다.
생애 처음 청약에 당첨되어 입주했던 월계동 초안산 자락의 아파트.
그곳은 마치 산속 콘도 같았다.
사계절 내내 제 빛을 바꾸는 초안산이 아침마다 창문 틈으로 빛과 바람을 밀어 넣으며 내 삶을 한껏 환하게 열어주던 곳이었다.
그곳에서 종교활동을 하며 한 분의 형님을 만났다.
오랜 금융인의 길을 걸어 금융회사의 대표까지 지냈던 분이지만, 막상 마주하면 권위보다 따뜻함이 먼저 느껴지는 분이었다.
소탈한 웃음과 단정한 태도 속에서
나는 처음으로 ‘어른’이라는 단어의 얼굴을 보았다.
3년의 시간을 함께한 뒤, 형님은 목동으로,
나는 아이들 교육을 위해 중계동으로 이사하며 자연스레 멀어졌다.
가끔 건네오는 안부 전화가 인연의 끈을 가까스로 이어주었지만 세월은 그마저도 흐릿하게 만들곤 했다.
그러던 며칠 전, 문득 올해가 가기 전에
형님을 꼭 한번 찾아뵈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아마도 내게 ‘어른의 무게’를 처음 보여준 분이었기 때문이리라.
갑작스러운 아침 전화로 만남이 잡혔다.
목동성당 앞에 먼저 나와 서 계신 형님을 본 순간,
20년이라는 시간은 마치 먼지를 털어낸 초상화처럼 한순간에 걷혀버렸다.
그분의 기품만이 오히려 더 분명해진 듯했다.
함께 식사와 커피를 나누며
우리는 지난 20년의 시간을 조심스레 펼쳤다.
형님은 내 아들의 이름까지 기억하고 계셨고,
머리는 희어졌지만 기억의 결은 오히려 더 날카롭게 빛났다.
초등학교 4학년이던 아이가 이제 서른넷의 청년이 되었고, 그 사이 형님과 나는 세월의 무게를 나란히 짊어진 동행인이 되어 있었다.
형님은 요즘도 매일 두 시간을 책과 함께 보내며
글쓰기에 대한 미련을 놓지 못한다고 하셨다.
나는 조심스레 브런치에 글을 쓰고 있다고 말씀드렸고,
형님은 과분한 칭찬을 건네셨다.
그 칭찬이 마치 오래된 나무가 건네는
조용한 축복처럼 느껴졌다.
우리는 음악을 이야기하고,
그림을 이야기하고,
책을 이야기했다.
여든을 넘긴 형님과 이런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사실이 한편으로는 기적처럼 느껴졌다.
삶을 어떻게 채우느냐에 따라
노년의 대화가 결정된다는 생각이 스쳤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핸들을 잡고 있던 내 손위에 위에 남아 있던 형님의 손 온기를 떠올렸다.
과연 내가 형님의 나이가 되었을 때
스무 살 아래의 누군가와 이런 대화를 나눌 수 있을까.
그건 우연이 아니라
지금의 삶을 얼마나 지키고 다듬느냐에 달린 일일 것이다.
삶의 결을 놓치지 않고
읽고, 보고, 느끼고, 쓰는 일들을
날마다 성실히 이어가는 사람만이
오랜 세월 뒤에도 ‘대화가 가능한 어른’으로 남을 수 있을 것이다.
형님의 얼굴에는 김수환 추기경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다른 이들도 종종 그렇게 말한다며 웃으셨다.
오늘의 만남은 그 말이 결코 과장이 아님을 보여주었다.
삶의 태도와 말투와 시선이
얼마나 깊이 한 사람의 품격을 빚어내는지
나는 형님을 통해 배운다.
나도 그런 어른으로 늙어가고 싶다.
누군가에게 단단한 나무 한 그루처럼 기억되는 사람이 되기를.
언젠가 나 또한
나이를 ‘겹겹의 지혜’로 변환시키는 사람이 되기를.
어른이 되고 싶다는 바람은,
결국 더 늦기 전에 나를 바로 세우고 싶은 마음인지도 모른다.
그 마음에 오늘, 조용한 등불 하나가 켜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