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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파스빈 Jun 22. 2023

그리운 나의 아버지

아버지 5주기에 부침


어릴 적 아버지는 내게 너무도 무서운 존재였다.

아버지의 가부장적 봉건적 사고체계를 대항할 만한 적수가 우리 집엔 없었다.

그래서 모두들 아버지의 명령에 일사불란하게 움직여야만 했다.


다정다감한 분은 아니었고 학교에서 학생주임은 도맡아 하셨던 분이라 그 위엄이 집에서도 고스란히 전해졌으니 우리 4형제자매는 모두 1인 독재체제에 길들여져 살아야만 했다.

오죽하면 중학교 1학년때 결혼을 하는 큰누나가 그리도 부러웠을까 왜냐하면 아버지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 있었으니 나로서는 부러울 수밖에.


그런 아버지셨지만 연세가 들고 할아버지의 반열에 도달하셨을 때는 누가 봐도 그냥 힘없는 노인의 모습이었고 호랑이 같은 아버지가 이제 이빨 빠지고 갈퀴마저 사라져 버린 가여운 모습으로 변해있을 때야 비로소 아버지와 아들의 애틋한 관계가 성립되었다는 게 참 아이러니하다.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는 화려한 봄날 태어나신 아버지는 만개한 벚꽃이 하늘거리며 꽃잎을 떨구는 5년 전 봄날 벚꽃처럼 허망하게 가셨다.

아무도 아버지의 임종을 지키지 못한 채 홀연히 가버리셨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 5개월 만에...


나는 졸지에 고아가 되어버렸다.

그 허망함이란 이루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이제 부모님이 안 계신 세상을 나는 살아가야 했다.

아직은 아버지랑 더 많은 얘기를 나누고 싶었는데 아버지가 할아버지가 되시고 난 왠지 그런 아버지에게 더 많은 의지가 되었던 거 같다. 더 인간적이셨고 그 어느 때보다 아버지와 많은 얘기를 나누었었다.  

그래서 어릴 적 엄마가 더 좋았다면 나이 들어서는 아버지가 더 좋았다.


같은 남자로서 남자의 인생을 얘기 나눌 수 있는 가장 가까운 벗 같은 존재였었다.

그런 아버지를 하늘나라로 보내고 많이도 허망하고 허탈했었다.

마지막 관속에 누워계신 아버지 이마에 입 맞추며 내가 했던 말은 아버지 사랑합니다였다.

고향집에 갔다가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언제나 나는 엄마 아버지를 안아드리며 사랑한다는 말을 꼭 전해드렸다는 것이 아버지를 떠나보내고 그래도 다행이라 생각하는 거다.


처음 한두해 부모님 산소를 찾아뵐 때면 늘 눈가에 눈물이 고였지만 이제 산소에 가면 반갑게 인사를 건네는 시절이 되었다. 세월이 나를 그렇게 만들어주었다.

이제 다시는 부모님을 뵐 수 없지만 우리 4형제의 가슴엔 누구보다 사랑하는 부모님이 자리해 있다.

언제나 우리들을 위해 기도해 주시던 그 모습을 기억하기에 우리도 건강하고 행복하게 남은 삶을 살아가려 한다.


형제들도 이제 모두 환갑을 넘긴 나이 들이니 당신이 갔던 길을 우리도 따라가야겠지만 살아있는 동안 우리도 우리 자식들의 아버지이고 어머니이니 부모 노릇 단단히 하면서 살다가 가야겠다는 생각이다.

그렇게 세월의 수레바퀴가 한 바퀴 돌 때면 나의 자식들이 또 나의 길을 따라갈 것이다.

이제는 눈물이 사라지고 추억만 남아있는 나의 아버지이지만 우리 형제들의 가슴엔 늘 고마운 아버지로 기억될 것이다.


우리가 사라지고 또 내 자식이 세상에서 사라질 즈음 아무도 기억하는 이 없겠지만 한 세상 살았던 나의 기억으로 나도 사라져 갈 것이다.

그러니 무슨 욕심을 부리며 살겠는가.

주어진 생명에 감사하며 사랑하며 베풀며 살아가야지 않겠는가.

아버지의 5주기를 맞으며 아버지의 사랑을 되새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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