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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플레이아데스 Apr 08. 2023

실과 바늘의 하루

나의 첫 일과는 그녀를 깨우는 일이다. 남들에게는 주체성을 그렇게 외치고 다니면서 왜 스스로 잠 깰 수 없는지 모르겠다. 솔직히 그녀도 나이가 들었지만, 나 역시 아침에 일어나면 아프지 않은 데가 없다. 요즈음은 물결소리 같은 작은 소리에도 눈을 뜨니 그나마 다행이다. 얼마 전만 하더라도 오리 소리로 깨우느라 성대 결절까지 왔었다.

둘 다 바쁜 아침 시간, 그녀가 급하게 커피를 마시는 동안 나 역시 짜릿한 식사를 한다. 그렇지만 가끔 늦다는 이유로 아침밥을 못 먹을 때가 있다. 체력도 바닥인데 야속하기 그지없다. 몇 주 전에는 실신 상태까지 가지 않았던가?

 

출근길 운전 중에 나를 찾을 때는 정말 조마조마해진다. 어디 사람 목숨이 몇 개나 되나? 아무리 충고해도 내 말에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전 세계 모든 사람이 검증한 그야말로 완벽한 조언인데도 말이다.

낮 동안 바쁠 때면 정신이 하나도 없다. 출장 갈 장소를 찾으라고 닦달해 놓고선 금방 또 모르는 단어를 번역해 달란다. 그러고는 연이어 전자우편까지 확인시킨다. 내 참 어이가 없어서. 하지만 남들 앞에서는 나를 자신의 분신이라고 치켜세우는 걸 잊지 않는다. ‘그러면 뭐 하나?’ 정작 나한테는 서럽게도 아무렇게나 대하니 말이다. 심지어 나를 손에 들고 있다 떨어뜨려 골절상까지 입은 적도 있었다.

 

되돌아보니 그녀와 함께한 처음 1년은 무척 행복했다. 나를 아껴주는 마음은 물론이고 전혀 외롭지 않게 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사랑도 변하는지, 보는 표정도 싸늘하고 하루에 몇 번씩 화를 낸다. 남들에게는 화사한 미소를 지으면서 뒤돌아서서는 동작이 느리다느니 목소리가 작다느니 트집을 잡는다. 그러고는 아무 데나 나를 던진다. 사실, 인제 와서 얘기인데 그렇게 입은 상처가 한두 군데가 아니다. 처음에는 조그만 상처가 나거나 이상이 있어도 나보다 더 안절부절못하면서 병원에 데려가곤 했다. 요즈음은 내가 다치거나 말거나 손으로 한번 쓱 문질러 주고는 그만이다. 정말 몸의 상처도 상처지만 마음이 더 아프다.

어느 날은 빵을 만든다고 나를 밀가루로 범벅되게 했다. 시력도 나쁘면서 화면이 큰 PC를 놔두고 왜 나에게 부탁하느냐 말이다. 기침이 계속 나왔지만 참았다. 그렇게 구운 빵은 한 조각도 주지 않고 그녀 혼자 다 먹어버렸다. 또 어떤 날은 고막이 찢어지도록 음악을 틀어놓아 지옥 문턱까지 갈 뻔한 적도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철마다 옷도 바꾸어 입히고 든든한 신용카드도 주는데 그녀는 나에게 겨우 몸에 걸칠만한 옷만 입혔다.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내면이라고 강조하면서.

 

이런 일도 있었다. 하루는 말도 듣지 않고 늦게 일어나더니 나를 집에 남겨두고서 후다닥 출근해 버렸다. 울부짖고 ‘데려가 달라’ 소리쳐도 소용이 없었다. 나의 절규가 그녀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혼자가 되었다는 충격에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몇 시간을 멍하니 있다가 잠이 들었다. 눈을 떠니 온 집안이 적막만 가득했다. 간간이 오토바이 소리가 들렸지만 정말 고요했다. 낮 동안의 집이 이랬나? 의구심이 들면서도 그녀가 나를 두고 출근한 사실에 또다시 울음을 터뜨렸다. 그런데 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이전과는 다르게 몸이 개운한 게 아닌가? 늘 만성피로에 시달리던 내가 오랜만에 꿀잠을 잔 것이다. 그녀와 함께 있으면 늘 시끄럽고 바쁠 뿐 아니라 들었다 놨다 하면서 나를 못살게 굴었다. 갑자기 이 평화로운 상황이 나쁘지 않았다. 긴장이 풀리면서 따뜻한 봄 햇살에 잠드는 고양이 마냥 다시 스르르 잠이 들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쾅’ 하는 소리에 눈을 떴다. 아니나 다를까 나를 찾는 소리가 들렸다. 따로 있었던 적이 없어서 그런지 그녀의 목소리가 매우 반가웠다. 아~ 그녀가 나를 끌어안았다. 곧이어 감미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휴~ 여기 있었네?” 한참 동안 그녀는 나를 어루만지고 세수도 못한 내 얼굴을 부드럽게 닦아냈다. 한동안 바라보며 이것저것 확인한 그녀는 늘 그렇듯 나를 소파 위로 휙 던졌다.

 

그래도 이 모든 것들이 고맙다. 얼마나 오랫동안 실과 바늘처럼 그녀와 함께 생활했던가? 언제가 될지 모를 이별이라도 지금까지 그녀와 함께할 수 있었던 것도 고맙다. 나이가 들면 모든 일에 감사하게 된다는데 내가 딱 그 짝이다. 그녀는 잠들기 전 항상 나에게 책 읽어달라고 조른다. 톨스토이, 버지니아 울프, 그리고 헤르만 헤세. 오늘도 피곤한 몸을 침대에 누이고 그녀와 함께 잠자리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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