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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플레이아데스 Jul 05. 2023

가방 속 해바라기 씨

가방을 세탁하려고 이것저것 끄집어내던 중 해바라기 씨가 툭 떨어졌다. ‘아 맞다.’ 그제야 생각이 났다. 선식을 주로 하는 지인으로부터 얻어온 씨였다. 가방 속에 넣어두고 한동안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부터 ‘해바라기 키우기’라는 새로운 일상이 시작되었다. 파종에서 수확까지 온갖 정보를 수집했다. 온라인으로 모판흙과 몇 개의 텃밭 도구를 주문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먼저 씨앗을 젖은 종이 행주에 싸서 플라스틱 용기 속에 넣고 일주일을 기다렸다. 다섯 개 중 세 개가 싹이 텄다. 두 개는 끝내 싹이 나오지 않았지만, 발아율이 50%를 넘겨서 만족스러웠다. 조심스럽게 발아된 씨앗을 작은 화분에 심었다. 3월이라 그런지 쉽게 자라지 않았다.

일주일이 지났을까 떡잎 두 개가 보이기 시작했다. 아침마다 눈뜨자마자 베란다로 가서 해바라기의 줄기와 잎들을 관찰했다. 세 그루 모두 자라나는 모습이 달랐다. 튼튼한 그루가 있는가 하면 또 하나는 잎의 모양이 찌그러지고 다른 하나는 줄기가 매우 가늘었다. 불안정한 줄기에 지지대를 세우고 부드러운 마스크 끈을 이용해서 묶었다. 보기에도 정말 안쓰러웠다.

세 그루 모두 어느 정도 자랐을 때, 한 그루는 엄마 집으로 보내고 두 그루는 텃밭으로 옮겨 심었다. 구분하기 쉽게 해돌이, 해순이라고 이름 붙였다. 일교차가 심한 날에는 밤사이 영하로 내려갈까 봐 긴장되었다. 줄기가 약한 해순이는 낮에 햇빛을 충분히 받게 하고 밤마다 긴 화분을 덮어씌웠다. 어떤 날은 바람이 몹시 강했다. 저녁 내내 지켜보다 기왓장으로 가림막까지 설치했다. 그러고도 잠이 오지 않았다.

게다가 밤이 되면 고라니가 내려와서 사철나무와 뽕나무 순을 따먹었다. 고추의 어린잎과 딸기 순을 하룻밤 사이에 다 먹어 치우기도 했다. 점잖게 ‘고라니 출입금지’라는 팻말을 달아도 속수무책이었다. 주변에서는 ‘고라니 한글 교육부터 시켜야 하는 거 아니냐?’라고 놀렸다. 불안한 밤들을 보냈지만 고맙게도 해바라기에는 입을 대지 않았다.

그렇게 노심초사하는 마음으로 하루하루가 지나갔다. 아침저녁으로 물을 주고 온갖 정성을 쏟았다. 어느덧, 햇빛이 비치는 시간과 비례해서 해바라기는 부쩍 자라기 시작했다. 걱정했던 해순이도 줄기가 굵어졌고 튼튼하게 자랐다. 5월 말이 되니 줄기 끝에 꽃이 생기기 시작했다. 한 개의 씨앗이 이렇게 크고 예쁜 꽃이 된다니 정말 신기했다. 가방 속에서 보물을 캐낸 느낌이었다. 한 줄기에 꽃이 일곱 개나 달려 검색해 보니 해바라기 종류도 정말 다양했다. 해를 향한다 해서 해바라기라 한다지만 내가 보기엔 꽃이 무거워 항상 고개 숙이고 있는 것 같았다. 가방 속 잊혔던 씨앗이 꽃이 되기까지 고작 몇 달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정말 오랜 시간처럼 느껴졌다.

문득, 법정 스님의 ‘무소유’ 속 난초 이야기가 떠올랐다. 난초에 대한 지독한 애착이 괴로움인 것을 깨닫게 된 스님. 그제야 법정 스님의 난초와 겹쳐지면서 무소유의 의미가 내 마음속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집 바깥에 둔 다육이가 없어져 경찰에 신고한 여동생도 생각났다. ‘뭐 그렇게까지 할 거 있나’ 라 생각했는데 막상 내가 경험하면서 해바라기에 대한 집착은 여동생과 다를 바 없었다. 마음 졸이며 해바라기 키우기에 몰두하던 동안, 가족 간에도 작은 다툼이 있었고 무엇보다 나 자신이 해바라기 외에는 관심을 거의 두지 않았다. 물론 해바라기가 자라는 동안 경이로운 경험을 했고 일상의 행복도 느꼈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나 역시 해바라기를 향한 과도한 집착이 괴로움을 만들지 않았던가? 집착을 버려야지만 진정한 마음의 평화가 온다는 교훈도 되새겨졌다.

그러나 평범한 사람으로 살아가면서 그러한 깨달음을 늘 인식하며 산다는 것이 쉽지 않을 것이다. 사랑 속에도 고통이 들어있음을 안다. 우리의 삶은 선택의 연속이고 긴장의 연속이다. 오늘도 사랑하고 집착하며 살 것인가, 그것에게서 벗어나려고 노력할 것인가의 선택 앞에서 고민한다.

내리는 비를 보며, 어쩌면 해바라기도 인간이 애쓰며 주는 물보다 자연이 주는 물이 더 반갑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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