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분지족
가을비가 촉촉이 내리고 있어 집뒤 야산에 서 있는 밤송이가 떨어지고 난 후 아직 나무를 지키고 있는 잎사귀에 빗방울이 대롱대롱 매달려있다.
화실촉 나무 황금 회화나무 맨그루 단풍나무 장미 덩굴 딸기 덩굴 노란 마리골드 망초가 정원에 무질서하게 자라고 있다. 집사람은 자연친화적이라고 말한다.
2년 전 심은 화살촉나무에 빨간 단풍이 들고, 흰색꽃이 열매가 주렁주렁 열린 모습을 보다가, 가까이서 단풍잎을 앞뒤로 자세히 보니 줄기와 연결하는 '잎자루', 잎의 수분과 영양분을 공급하는 잎의 신경세포인 '잎맥'과 잎의 넓적한 몸통 잎사귀 '잎몸'이 선명히 보인다. 평소 알지 못하던 이런 어려운 용어는 "숲에서 인생을 배우다"에서 읽은 것인데 알고 보니 다른 느낌이다. '예술은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과 같은 이치일지 싶다.
오래 비워둔 집 정원 잡초를 연휴 내내 뽑고 지쳐 어지럽다며 이틀 종일 누워있는 집사람 옆을 호위무사 히꼬가 지키고 있다. "고까짓 잡초 뽑았다고 드러누운 게 좀 웃기다"라고 핀잔은 주었지만, 괜히 걱정이 앞선 것도 사실이다. 그가 잠시 잠든 사이 낙서장을 슬쩍 펼쳐 보니 '히꼬', '원배, 민기'가 휘갈겨 있다. 내 이름은 없다. 잠에서 깨어난 그에게 내 이름만 없는 낙서 이유를 물었더니, 히꼬는 말 못 하는 짐승이니 자기가 죽으면 제일 걱정이고, 원배 민기는 그냥 써놓았으며, 나는 오지랖 떨고 다니니 자기 없어도 잘 살거라 여겨 생각나지 않았다고 한다.
연휴에 서울서 번갈아 친구들이 찾았다. 차로 1시간 남짓 거리지만 찾아준 게 반갑다. 50년 초딩 여사친 부부가 와서 맛집에 가고 함께 최근에 신륵사 앞에 오픈한 남한강 출렁다리를 걷고, 야외 커피 한잔을 하며 보냈다. 또 선천과 광조우 다녀오자 온 내 친구가 찾아와 나라 안팎의 세상 이야기하고, 차로 10분 거리의 집 근처 신라시대의 천년고찰 고산지 터에 가서 히꼬와 공차기하며 신나게 시간을 보냈다. 텅 빈 절터와 여기저기 주춧돌만 보이지만 한때 수백 명의 스님이 있었으며 임진왜란 때 소실되고 그 이후 없어졌고, 몇 점의 보물은 서울 중앙박물관과 여주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고 안내판에 쓰여있다.
집사람은 학교 교과서에서 본 적이 있고, 자기가 여주서 제일 좋아하는 곳이고, 탁 트인 여백 공간이라 더 좋다고 한다. 두 아들과 히꼬 넷이 나만 빼고 온 적이 있었는데 내가 마음에 걸려 내 친구가 온 김에 왔다고 괜히 인심 쓰듯 말한다. 부산 생활 후 다시 여주로 오면 내가 살살 운전해 자주 와도 좋은 고산지 터다.
고산지를 둘러보고 오는 길에 여주서 유명한 골프장 중 하나인 블루헤런을 지나다 보니 인봉 농원 간판이 보여 무작정 갔더니 그곳에 홍옥 홍여 골든 사과가 가지가 뿔어질 정도로 달렸다. 인심 좋게 생긴 안주인은 50년간 여기서 사과 농사를 지었다며 냉장창고로 안내해 들어가 보니 추워서 이내 나와야 할 정도였다. 이것저것 맛보다가 주먹 반만 한 골든 사과 반박스 5만 원에 사서 친구와 반반 나눴다. 여주인이 일주일 후면 더 맛있는 사과가 나오니 다시 오라고 하지만 난 부산으로 가 올 수었고, 집사람은 차가 없어 못 온다. 냉장 사과가 있으니 친구와 지인이 내방하면 고산지 터와 인봉 농원을 투워 일정으로 묶어 마지막에 사과 반박스를 나눠 주는 여주의 삶을 꿈꾼다.
가을비가 내린다. 야산의 짙은 녹음이 어둠과 함께 더 까마지고 있다. 집으로 로는 길 코스모스가 한들한들 피어있다. 산다는 게 그리 많은 돈이 필요하지 않고, 이렇게 친구와 지인과 어울리며 지내면 충분하지 않나 싶다는 생각이 든다. 안분지족을 다시 생각하는 여주의 추석연휴 끝자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