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시니어 분들과의 수다
해외 출장으로 며칠 비운 사이 유엔 묘지의 꽃과 나무의 모습이 새롭다. '일일우일신'이란 게 이런 건가 싶다.
작년 연말 추모관에 심은 노란 팬지가 절정을 뽐내고, 지난달 말 행정동, 추모관, 기념관에 심은 데이지, 금잔화가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숙죽은 한송이만 피었지만
금잔화(4.10) 데이지(4.10)
석죽(일명 패랭이꽃, 4.10)
4월 둘째 주 오후, 어느 때처럼 점심 후 직원 한분과 유엔 묘지를 한 바퀴를 여기저기 돌아보았다.
추모관 옆에 언제 피나 했던 보라색 라일락이 피었다. 멕시코 집에 허드러지게 핀 하카란다 꽃이 생각난다. 지난주 아세안 관련 온라인 세미나의 호주 참석자 뒤에서도 보았던 하카란다의 보라색에서 내가 살았던 멕시코와 호주의 좋았던 추억이 소환된다.
보라색 라일락 꽃(4.10)
묘지 내부 도로에 묘지 담장용으로 듬성듬성 심어져 있는 홍카시 나무의 잎이 단풍잎처럼 이쁘게 물들었다.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고 있다는 착각이 들 정도로 등짝이 땃땃해지는 4월 오후 햇살에 빨간 홍가시 잎은 반짝 거리며 이쁜 꽃만큼이나 화사하다.
홍카시 나무(4.10)
홍카시 나무에 하얀 꽃까지 피었다(5.8)
올해 2~3월 주묘역(한국전 참전용사 2,330분 묘지)의 오래된 영산홍 나무가 고사해 1년 산 묘목 2,000주를 심었는데 짧은 시간에 연분홍색 연산홍 꽃이 피었다.
기존 짙은 분홍색(자홍색) 영산홍꽃으로 알고 주문해 심었는데 피고 보니 살짝 달라 화원의 상술에 사기당한 느낌이지만 연한 붉은 영산홍이 기존 영산홍 꽃보다 빨리 펴서 좋다. 또 두 색이 섞여 있으면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을 하다가 우리 인생사도 이런 게 아닌가 하는 엉뚱한 비유에 이르렀다. 나도 살다 보니 당시에는 몰랐지만 예기치 못한, 또 원치 않던 일이 나중에 더 좋은 결과로 이어질 때가 많았던 기억이 있다.
연한 붉은색 영산홍(4.10)
주묘역과 녹지 구역을 가로지르는 메인 인도의 정중앙에서 유엔기 등 22개 참전국기가 나부끼는 상징구역이 한눈에 보이는 곳에 물오른 팬지가 참배객과 상춘객을 맞이한다. 내가 잠시 비운 며칠 만에 꽃 색깔이 더 선명해졌다.
옆에 있던 직원이 온실에 있는 사루비아, 여러 가지 색의 남은 데이지가 꽃을 튀어 너무 늦게 식재하면 활짝을 못한다며 걱정을 한다.아직 오스테우스 펄멈(남아프라카 원산지)은 아직이다. 더욱이 올해는 팬지가 더 이쁜 데다 6월까지도 갈 수 있는데 뽑고 온실에서 이곳으로 오기를 기다리는 꽃들에게 양보해야 하니 아깝다고 한다.
메인 인도에서 상징구역이 바라 보이는 포토존 의자 뒤에 식재된 팬지(4.10)
오스테우스 펄멈을 드디어 온실에서 나와 팬지 대신 심었다(5.8)
생각난 김에 외부인 통제구역에 있는 온실로 갔더니 정말 빨간색, 연한 연두색 사루비아 꽃이 '왜 나를 이 답답한 여기에 두냐'며 볼멘 소리로 속 썩이는 듯하다. 데이지 꽃도 '딴 친구들은 밖에 여기저기 심어 놓고 왜 나만 공정하지 못하게 여기 처박아 두냐'라고 거든다.
작은 깻잎닮은 사루비아 데이지(4.10)
작은 배추잎 닮은 흰색 데이지(4.10)
데이지(4.10)
이런 소리를 들었는지 옆에 있던 직원이 며칠 내로 사람들이 제일 많이 오고 가는 인도의 안전 가드레일에 달린 걸이식 화분으로 옮겨 줄 테니 기다리라고 위로의 말을 한 후 온실을 나왔다. 더 있으면 물을 적게 준다느니, 밤엔 춥다느니 불평을 늘어놓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온실을 나오니 꽃들에게 시달렸을 우리를 위로나 하듯 흰색 복숭아꽃이 활짝 피었다. 1년 반전 여주 집에 복숭아꽃(도화) 나무를 화원에서 살 때 화원 주인이 도화 꽃은 너무 이뻐 예로부터 정원수로는 심지 않는다고 했던 기억이 난다. 너무 이뻐 주인이 바람나기 때문이라고 했는데 그게 무슨 말인지 이제야 알지 싶다. 다행인지 몰라도 여주의 복숭아나무는 죽었다. ㅠㅠ
흰 복숭아나무 꽃(4.10)
복숭아나무에 정신을 거의 잃을 때쯤 근처에 서있는 화사한 빨간 곁벚꽃이 참 이쁘다. 한참 셔트를 눌렀다.
빨간 곁벚꽃(4.10)
화산 꽃들에 눈에 홀려 호수 쪽으로 나가는 길 양쪽에 야생 노란 민들레가
'꽃은 늘 보아도 수수한 민들레지'라며 내 벌 길을 잡는다. 야생 꽃도 잡초와 같이 모아두면 다른 묘한 멋이 있다.
야생 민들레(4.10)
또 야생 민들레에 '명자야' 트롯 노래의 빨간 명자 꽃나무도 새로 발견했다.
명자 꽃(4.10)
한태 우정의 다리로 연결된 호수 가운데 자리 잡은 '작은 섬'인 연못 섬엔 벚꽃, 연산홍 및 속국이 심어져 있고, 호수엔 물고기와 주인장 오리 2마리가 있다.
연못 섬(4.10) 한태 우정의 다리(4.10)
연못 섬을 둘러보는데 친구들로 보이는 70대 중반은 넘어 보이는 여성 시니어 네 분이 솟구치는 작은 분수를 열심히 보며 소녀같이 신이 난 표정이다. 무슨 일이냐고 물으니 포수 분수가 뿜는 사이로 무지개를 보라며 마치 엄청난 보물을 발견한 양 들떠있었다. 흐릿하게 보여 사진 찍어도 잘 보이지 않지만 진짜 무지개다. 자기네가 오늘 무지 운이 좋은 날이라고 한다.
연못 섬 무지개(4.10, 거의 안 보인다)
여기서 어려서부터 자라 이곳에 소풍 와 도시락도 까먹고 놀던 곳이고 나이 든 지금도 이 근처에 살며 자주 오지만, 무지개는 본 건 처음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내 소개도 하며 덩달아 이런저런 수다를 같이 떨다가 혹시 불편한 게 없냐고 하니 그분들이 이 아름다운 곳에 벤치 몇 개 설치할 수 없냐고 했다. 벤치 설치를 검토했으나 키 작은 덩굴로 연못 들레 담장을 해 혹시 엄마와 함께 온 아이들이 장난치다가 사고가 생길 수 있어 안전 문제 때문에 설치를 고민하다가 보류했다고 설명했더니, "아, 그렇겠네요"하며 고개를 끄덕이며 아쉬운 표정으로 뒷모습을 보이며 총총히 갔다.
수국(4.10) 붉은 연산홍(4.10)
내가 직원에게 연못 가가 아니고 섬 꼭대기 평평한 곳 네 군데 벤치를 놓는 것을 다시 생각해 보면 어떨지 이야기했다.
이 연못 정상에 연못이 내려다보는 벤치가 새로 생겨 그분들이 다시 무지개를 보며 소녀처럼 좋아하는 모습을 그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