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후배의 '자존감' 문자
현직 때 10년 전 같이 일한 후배가 문자가 왔다.
험지 근무하다가 일본으로 근무지를 옮기는 그는 가족들과 부산에 휴가 왔다고 한다.
부산에 내려온 후 적잖은 지인들이 연락 와 유엔묘지도 구경시켜 주고 해운대 해변에 있는 곳에서 식사 한 끼를 하며 추억과 그간 못한 가슴속에 있는 솔직한 이야기를 하며 보내는 부산 살기가 좋다.
서울에서 한 뼘 떨어져 있어서 스쳐간 만남은 안 해도 돼서 더 좋다. 아무리 부산에 일 때문에 와서 연락한다고 하지만 짧은 여행기간 중 잊지 않고 만나자는 게 여간 고맙고 감사한 게 아니다. 더욱이 내가 식사 한 끼 살 수 있는 여유가 있어 더 그런지도 모른다.
이런 나에게 마누라는 빈정댄다. 이제 인생 2막을 살면 그만 오지랖을 부리고 내면을 바라보며 혼자 잘 지내는 법을 터득하라고 잔소리한다. 자기가 먼저 죽으면 내가 이 사람 저 사람 만나느라 너무 바빠 반려견 '히꼬'를 볼 시간도 없을 것이라며 할 수 없이 더 살아야 한다고까지 한다.
120년만 부산 더위가 폭염에 바닷물도 더워질 지경이고, 마린시티 고층 빌딩 속 아파트는 유리 창문 때문에 열기가 더하다. 자살방지용인지 문이 얼굴을 겨우 빼꼼히 내 밀만큼만 열려 해풍의 어디밴티도 없어 실내보단 실외로 나가야 살만하다. 해풍에 빌딩 바람이 더해 바깥 의자에 가만히 앉아있으면 이 폭염에도 견딜만하다.
엊그제부터 폭우가 내려 연신 안전 안내문자가 삑 하며 핸드폰 액정에 나타난다. 그 뜨겁던 해운대 해수욕장의 파도도 폭우와 함께 일렁인다.
아른 새벽 서울행 열차 안의 차창에 비가 내리친다. 가느다란 꼬리의 올챙이가 차창을 대각선으로 줄지어 간다. 마치 꿈속에서 실지렁이가 움직이는 느낌이다.
기차 바퀴가 철로에 부딪치며 내는 찌직~소리가 기차변 아파트 주민들을 깨우고, 더위에 지친 나무와 풀들을 모처럼 흠뻑 젖게 한다.
서울도 비가 많이 온다. 행사를 마치고 다시 부산행을 준비하는 아침, 이른 아침부터 비가 온다. 커피숍에서 씁쓸럼한 카페 라테를 마시며 알랭드 보통의 '슬픔이 주는 기쁨'을 읽으며 카페 밖 차장 앞 도로변에 고인 웅덩이 위로 빗방울이 떨어지는 흔한 모습도 보이고, 구기동 집들 너머 병풍처럼 걸려있던 북한산이 안개에 싸인 모습도 보인다.
다시 후배를 생각한다. 문자가 왔다. '제가 자존감이 낮아져 아무래도 만날 수 없고, 마음만 받겠다'는 문자다. 자기가 뜻한 대로 풀리지 않는 직장에서 가족보기도 직장 내 동기들에게 자기감정을 내보이기 싫은 모양이니 실질적 도움을 줄수도 없는 나에게 속마음을 들키고 싶지 않은 모양이다. 그래도 자존감이 낮아졌다는 속내는 문자로 남겼으니 조금은 그의 처지를 이해할 수 있다.
이 폭염을 떨쳐내고 있는 폭우가 지난 후 다시 폭염이 오고, 그러길 한두 차례 하다 보면 선선한 가울이 온다고 그 후배에게 말해 주고 싶다. 살아보니 사는 게 별 거 아니라고, 그냥 있는 이 자리에서 지키며 지내다 보면 '이 또한 지나간다'라는 평범한 이야기를 그가 공명했으면 좋겠다.
아직도 비는 내린다. 그가 마지막 날을 보내는 해운대나 광안리 해변에도 비가 내릴 것이다. 나는 내리는 비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이런 소소한 일상, 따분하고 평범한 일들을 보며, 그가 마음 챙김을 하고, 다음에 그가 부산에 올 땐 식사 한끼하길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