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를 달린다 28 : 몸을 사랑하라
- 28편 <양왕(讓王)>
진실한 도로써 자기 몸을 다스리고, [道之眞以治身]
그 나머지로써 나라를 돌보고, [其緖餘以爲國家]
그 찌꺼기로서 천하를 다스리는 것이다. [其土苴以治天下]
선거철만 되면 인재들이 출몰하며 출세를 선언합니다. 춘추전국시대에도 인재들이 넘쳐났습니다. 법을 개혁하고 법을 중시하는 법가(法家)와 사랑과 정의를 외치면 나서는 유가(儒家)가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이들은 세상을 바꾸겠다고 나서는 출세주의자들입니다. 이들의 공통적 태도는 선공후사(先公後私), 즉 공적인 제도와 시스템을 바꾸는 것을 우선하고, 이를 위해 개인적 이익을 뒤로하겠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들의 심층심리에는 공명심(功名心)이 있습니다. 공을 세워 이름을 알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와 대조적으로 도가(道家)로 대별되는 인물들은 세상을 바꾸겠다고 나서지 않습니다. 이들은 오히려 멸사봉공(滅私奉公)을 반대하고, 자신의 생명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이들은 역설적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천하를 다스리겠다는 생각이 없는 사람에게 천하를 맡겨라.” 노자는 “자신의 몸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천하를 맡기라”고 당부하고, 양주는 “천하를 위하여 자신의 털끝 하나도 희생하지 말라”는 경물중생(輕物重生)의 극단적 주장을 합니다. 장자는 말합니다. “천하란 큰 그릇이긴 하지만 그것으로 자신의 목숨과 바꾸지는 않겠다. 이것이 도를 터득한 사람과 세속적인 사람의 차이다.”
<장자> 28편인 <양왕(讓王)>은 지위나 명예, 권력보다 자신의 몸과 백성의 생명을 더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을 소개합니다. 몸을 중시한다고 하니 보신주의(保身主義)를 떠올릴지 모르겠지만, 장자는 차라리 자신의 삶을 온전히 하는 전신(全身)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삶을 온전히 하는 전생(全生)의 출발점은 전신(全身)입니다. 오늘날 용어로 말하지만 생명사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생명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남의 생명을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자신을 온전히 사랑하는 사람만이 남을 온전히 사랑할 수 있습니다. 자신이 도구가 아니라 목적일 때 타자도 도구가 아니라 목적으로 대할 수 있습니다.
나와 백성을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왕위를 양보한다는 뜻의 <양왕(讓王)> 편에는 이를 실천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처음으로 등장하는 사람은 주나라를 문왕의 할아버지 대왕단보(고공단보)의 이야기입니다. 무왕이 주나라로 천하통일을 하고 나서 추존하여 태왕(太王)으로 모셨던 분입니다.
대왕단보가 빈(邠) 땅에서 백성들과 평화롭게 살고 있는데 적인(狄人,흉노족)이 쳐들어옵니다. 대왕단보는 그들과의 전쟁을 피하고자 가죽과 비단, 개와 말, 진주와 구슬을 주며 달래지만 그들은 막무가내입니다. 그러자 대왕단보는 백성들에게 말합니다. “남의 형과 함께 살면서 그의 아우를 죽이거나, 남의 아버지와 함께 살면서 그의 자식을 죽이는 일을 나는 차마 못하겠다. 그대들은 모두가 힘써 여기에서 잘 살아라. 내 신하가 되는 것과 적인들의 신하가 되는 것이 무엇이 다르겠느냐? 내가 듣건대 백성들을 보양하는데 쓰이는 물건을 위해 보양할 백성들을 해치지 않는 법이라 했다.”
전쟁하기보다는 왕위에서 물러나기로 결심하고 지팡이를 집고 빈 땅을 떠나자 백성들이 모두 그를 따라 기산 아래로 이주합니다. 전쟁 없이, 아무도 죽지 않고, 평화롭게 이주한 것입니다. 땅보다는 백성입니다. 재물보다는 생명입니다. 장자는 말합니다. “대왕단부 같은 이는 삶을 존중할 줄 안다고 말할 수 있다. 삶을 존중할 줄 아는 사람은 비록 존귀하고 부하다 하더라도 몸을 보양하는 수단을 위해 자신을 손상시키지 않는다. 비록 가난하고 천하다 하더라도 이익을 위해 육체에 해를 끼치지 않는다.”
<양왕> 편은 이처럼 생명을 아끼고, 권력이나 지위를 도외시하는 사람들로 넘쳐납니다. 월나라 왕자 수는 수없이 많은 선왕들이 죽는 것을 보고 단혈로 도망가 숨습니다. 월나라 사람들이 단혈을 찾아가 왕이 되어달라고 호소하지만, 막무가내. 극단적은 조차로 굴 안에 쑥을 넣고 태워 연기 때문에 결국 밖으로 나오자 그를 임금이 타는 수레에 태워 모십니다. 그러자 왕자 수는 하늘을 우러러보며 울부짖습니다. “임금이라니, 어째서 나를 놓아주지 않는 것인가!”
월나라 사람들은 왜 임금노릇 하기 싫다는 왕자를 임금으로 옹위한 걸까요? 장자는 말합니다. “왕자 수는 임금이 되기가 싫었던 것이 아니라 임금노릇을 함으로써 생기는 환란이 싫었던 것이다. 왕자 수 같은 사람은 나라 때문에 자기 삶을 다치게 하지 않으려 했던 사람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월나라 사람들은 그를 찾아내어 임금으로 삼고자 했던 것이다.”
공자의 제자 중에서도 출세보다는 가난하지만 스스로 즐겁게 지내는 삶을 택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출세하여 큰 말에 수레를 끌고 찾아온 자공이 가난하게 사는 공자의 제자 원헌에게 왜 이렇게 고생하며 사냐고 묻자, 원헌은 말합니다. “내가 듣건대 재물이 없는 것은 가난하다고 말하고, 배우고도 행하지 못하는 것을 고생하는 것이라 말한다 합디다. 그러니 지금 나는 가난한 것이지 고생하는 것은 아닙니다.” 자공이 부끄러운 낯빛으로 변합니다. 원헌은 마지막 한 방을 먹입니다.
“세상의 평판을 바라면서 행동하고, 자기와 친하게 어울리는 사람만을 벗하고, 학문은 남에게 뽐내기 위해서 하고, 가르침은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 하고, 인의를 내세워 간악한 짓을 하고, 수레와 말을 장식하고 하는 일들은 나로서는 차마 하지 못할 일입니다.” 자공 패! 원헌 승!
안회도 자발적 가난을 선택하고 벼슬을 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공자가 안회에서 가난하니 벼슬을 하는 것이 어떠냐고 묻자 안회가 답합니다. “벼슬을 하고 싶지 않습니다. 제게는 성곽 밖의 밭 오십 묘가 있으니 죽거리를 얻기에는 충분합니다. 성곽 안에는 밭 십 묘가 있으니 무명과 삼을 얻기에 충분합니다. 금을 타고 지내면 스스로 즐기기에 충분합니다. 선생님으로부터 배운 도는 스스로 즐겁게 살기에 충분합니다. 저는 벼슬을 하고 싶지 않습니다.” 공자의 그의 태도를 칭찬합니다.
처음 소개한 인용구는 은둔자 안합에 대한 이야기에서 나온 것입니다. 노나라 임금이 안합을 중용하고자 사신을 보내 선물을 주고 초대하지만, 안합은 잘못 찾아왔다고 사신을 되돌려 보냅니다. 재차 확인한 후 다시 찾아가 보았지만 안합은 이미 그 집에서 사라진 후였습니다. 요즘 상황이라면 수신거부 후 이주해 버린 것입니다. 이에 대한 장자의 평입니다.
“옛말에 ‘진실한 도로써 자기 몸을 다스리고, 그 나머지로써 나라를 돌보고, 그 찌꺼기로서 천하를 다스리는 것’이라고 했다, 이렇게 본다면 제왕들의 공로란 성인들의 여분의 일인 것이며, 그런 일은 자신을 완전히 간수하고 삶을 보양하는 방법은 되지 못하는 것이다. 지금 세속의 군자들은 대부분이 자신을 위험에 빠뜨리고 삶을 버리면서까지 사물을 추구하고 있으니, 어찌 슬프지 않은가? 모든 성인의 행동이란 반드시 그것을 하는 까닭과 그것을 하는 방법을 반드시 먼저 살피는 것이다. 지금 여기에 어느 사람이 진귀한 수후의 구슬로 천길 높이의 참새를 쏘았다면 세상 사람들은 반드시 그를 비웃을 것이다. 그것은 그가 사용한 것이 귀한 것임에 반하여 그것으로 얻은 것은 가벼운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삶이 어찌 수후의 구슬의 귀중함에 비교되겠는가? “
무엇이 소중합니까? 생명입니까, 권력입니까? 삶입니까, 재물입니까? 장자는 가장 소중한 목숨을 다른 것과 바꾸지 말라고 말합니다. 설령 그것이 왕의 자리라 할지라도! 돈과 권력을 위해 목숨을 하찮게 여기는 현대사회에서 장자의 주장은 시대착오적이라 평가받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시대가 변해도 변하지 않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우리는 단 한 번 태어나 단 한 번 살아가는, 세상의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유일한 생명이라는 점 말입니다. 그러니 무엇보다 목숨을, 생명을, 삶을 소중히 여기십시오. 나머지는 쓰레기처럼 여기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