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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경윤 Jun 07. 2024

9. 고양이

도덕경 43장

1.

나는 개과(科)인 줄 알았다. 어렸을 때부터 개를 키웠고, 개도 유난히 나를 잘 따랐다. 국민학교(요즘말로 초등학교) 시절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멀리서 우리집 개 쎄미(스피츠 잡종)가 달려와 나를 반겼다. 나는 쎄미와 더불어 성장했다. 쎄미가 세끼를 낳으면 새끼들은 분양시켜 보냈지만, 쎄미는 계속 키웠다. 그러던 어느 날 쎄미가 사라졌다. 아버지가 친구에게 줘버렸다고 말했다. 나는 하루종일 울었다. 하도 우니까 엄마가 쎄미가 살고 있는 신당동 집을 알려줬다. (신당동은 내가 태어난 동네였다.) 나는 엄마가 준 돈으로 정릉에서  택시를 타고 그 집을 찾아가 멀리서 쎄미를 보고 왔다. 차마 그 집에 들어가지는 못했다.


그 이후로 나는 개를 키우지 않았다. 헤어지는 것이 두려워서였을까? 모르겠다. 이후 부모가 이혼하고 고아처럼 하숙집을 전전하며 살면서 혼자 있는 게 무엇보다 싫었다. 친구네 집, 교회에서 살다시피 했다. 하숙집은 잠을 잘 때쯤 들어갔다. 여럿이 같이 있을 때 좋았고 편했다. 그렇게 교회생활, 청년회 활동을 하면서 성장했다. 단체가 없을 때에는 심지어 모임을 만들어 운영했다. 고양시의 자유청소년도서관, 참새방앗간은 그렇게 해서 만들어졌다. 같이 살아가는 것이 사람맛이라고 믿고 살았다. (그 믿음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닌 것은 알게 되었다.)    

그림책의 한 장면. 나를 따르던 쎄미를 너무 닮았다.

2.

2023년 7월 고양이 여섯 마리를 돌보는 것을 조건으로 가파도 한달살이를 했다. 고양이도 개처럼 키우면 되는 줄 알았다. 아니었다. 개는 주인과 엄청 유대감을 형성하며 식구처럼 지내지만, 고양이는 밥을 줄 때를 빼고는 나를 외면했다. 왜 고양이를 키우는 사람을 집사라고 하는지 알았다. 개에게는 주인이지만, 고양이에게는 집사였다. 그렇게 한 달을 살다 보니 개보다는 고양이가 편해졌다. 나도 혼자 지냈지만, 고양이도 혼자서 잘 지냈다. 필요하면 만나고, 평소에는 독립적인 생활을 하는 이 짐승이 점점 마음에 들어왔다. 어릴 때는 개과였는데, 나이가 드니 고양잇과가 되었다.

지금 살고 있는 집에도 고양이가 살고 있다. 상주하는 고양이 두 마리, 출입하는 고양이 대여섯 마리. 나는 이들과 친하게 지내지만, 거리감을 둔다. 상주하는 고양이는 좀 더 나에게 다가오지만, 다른 고양이들은 6개월을 밥을 줬는데도 데면데면하다. 나는 그게 편하다. 칼릴 지브란이 <예언자>에서 “그대와 나 사이의 언덕에 일렁이는 파도를 두라”라고 말했는데, 이 적당한 거리감이 주는 긴장이 나를 훨씬 편안하게 한다. 외면하지는 않지만 지나치게 개입하는 삶, 홀로 지내고 싶을 때 마음 편히 혼자되는 상태가 지금 나이에 어울리는 삶의 방식인 것 같다.     

3.

삶도 많이 유연해졌다. 선악을 쉽게 판단하지 않고, 미추도 희미해진다. 강경한 태도, 강한 언어, 강한 행동을 꺼린다. 강경함을 버리니 표정도 부드러워진다. 사람들이 나를 보고 “편하게 지내는 것 같다”는 말을 많이 한다. 나이가 드니, 나를 드러내지 않고 사는 삶이 훨씬 자유로운 삶임을 알게 되었다. 될 수 있으면 일을 만들지 않으려 한다. 뭔가 해볼까 의욕을 펼치다가도, ‘그렇게 분주히 평생을 살았는데 지금도? ’하면서 욕심을 접는다. 뭔가를 하는 것보다 뭔가 하지 않는 데에는 더 큰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삼천 년 전 노자는 <도덕경>에서 유위(有爲)의 무익(無益)함과 무위(無爲)의 유익(有益)함을 이야기했다. 지금 나는 살아있는 노자, 고양이에게 새로 배우며 살고 있다. 부드러운 행동, 유연한 몸짓, 나른한 태도, 근심없이 깊은 잠,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운 삶. 나는 고양이처럼 어슬렁거리며 동네를 돌아다니고, 걱정 없이 세상을 보고, 즐거이 깊은 잠에 빠지고, 별일 없이 살아간다. 이보다 좋은 삶이 있을까?           

세상의 지극한 부드러움이

세상의 지극한 강함을 이기는 법

자신을 없애야 틈 없는 곳도 들어갈 수 있어요

그래서 나는 함없음[無爲]의 유익함을 알지요


말없는 가르침,

함없음의 유익함

세상에 이보다 나은 것이 드물지요. (43장)     


天下之至柔 馳騁天下之至堅 無有入於無間 吾是以知無爲之有益

不言之敎 無爲之益 天下希及之


The gentlest thing in the world

overcomes the hardest thing in the world.

That which has no substance

enters where there is no space.

This shows the value of non-action.     

Teaching without words,

performing without act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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