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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핵의 시기에 읽은 책

박구용, <빛의 혁명과 반혁명 사이>(시월, 2025)

by 김경윤

무사유가 '생각 없음'이 아니듯 무감각도 '감각 없음'이 아니다. 무사유와 무감각은 소극적 무기력증이기보다 적극적인 무시의 활동이다. 무사유와 무감각은 생각과 감각을 적으로 적시하고 파괴한다. 폭력은 망각 속에 감금시키고, 고통은 마취제로 은폐시킨다. 무사유와 무감각의 시대가 곧 폭력의 시대다. 특히 무감각에서 자양분을 제공받은 폭력은 잔인하고 가혹하다. (162쪽)


진정한 역사적 대화는 죽은 자의 부름에 산 자가 대답할 때, 그래서 앞서간 선조들을 우리가 뒤따를 때 이루어집니다. 강자에 대한 굴복과 기생이 자연의 법칙이라면, 시민 주권을 찾기 위한 저항은 자유의 원칙입니다. 우리 역사에서 권력자들은 오랫동안 자연법칙의 노예였습니다. 자유와 주권을 향한 저항의 주체는 언제나 농민, 민중, 민중, 시민이었습니다. 이들의 저항은 '우리 안팎의 타자'를 무력화하고 자해하려는 전략이 아니라, 타자와 더불어 소통하고 연대하기 위한 과정이었습니다. 이들이 싸운 대상은 타자가 아니라, 타자의 억압적 지배였습니다. (167쪽)



계엄을 해제하고 탄핵의 시기이다. 이 시기에 에너지가 넘치는 자들은 거리로 나서고, 마음이 아픈 자는 소주잔을 기울이거나 한탄을 하고, 연대하고자 하는 자는 돈으로 마음으로 응원한다. 그리고 글을 쓸 줄 아는 자는 글을 쓴다. 박구용 철학자가 단 10일 만에 쓴 책이 출간되었다. 이 책은 탄핵국면에 대한 정치철학적 해석이고, 새로운 공화국을 꿈꾸는 상상적 청사진이며, 투철하지 못했던 자신에 대한 반성문이자, 시대적 요청을 더 이상 외면하지 않겠다는 결의문이다.


김어준의 '뉴스공장'이나 '다스뵈이다'에서 보던, 최욱의 '매불쇼'에서 보았던 깔깔거리며 소리 지르는 대학교수쯤으로 여겼는데, 책은 달랐다. 정치철학자로서의 깊이뿐만 아니라, 다양한 분야를 섭렵하는 넓이, 그리고 긴박한 현실을 분석하는 날카로움, 새로운 공화국을 꿈꾸는 세계적 비전에 이르기까지 촘촘하고 진지하다. 현시국을 정확히 톺아보는 비판서로 읽어도 되지만, 철학의 역사가 펼쳐내는 다양한 분야와 핵심적 주장을 정리해 내는, 그리고 그것을 현실에 다시 대입해서 적용해 보는 교양서로 읽어도 좋다.

열흘 만에 썼다고 해서 쉽게 쓰인 글일 것이라고 선입견을 가졌다면, 그 선입견을 일단을 접어두기를 권한다. 물론 철학자 박구용의 입장을 수용하라는 말은 아니다. 이 책은 대답을 찾는 책이라기보다는 논쟁을 시작하기에 좋은 책이다. 탄핵의 국면을 어찌 맞이할 것인가, 탄핵 이후에 새로운 정치적 지형을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 정당과 시민단체, 시민들이 할 역할은 무엇인가, 우리 어떤 나라를 꿈꾸는가, 다시 희망을 가져도 되는가. 등등 이 책을 보며 많은 논제를 토론할 수 있으리라.


나는 심한 내란성 불면증을 앓지는 않았지만, 간혹. 문뜩 새벽에 깨면 가장 먼저 언론기사를 열어 윤석열 탄핵이 어떻게 되고 있는지를 확인하고 있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기는 하되, 생산적인 일은 아닌지라 차라리 깨어있는 시간에 독서를 선택했고, 그렇게 깨어있을 때 읽었던 책이 <빛의 혁명과 반혁명 사이>였다. 이제 다 읽었다. 한번 더 줄 치며 정리하고 읽고 싶기도 하고, 이 책에 등장한 오래된 고전들을 이어 읽고 싶기도 하다. 어쨌든 불면증 치료제로 꽤 효과가 있었다. 고맙다.


이 책의 마지막은 이렇게 쓰여있다.


"국가는 위기입니다. 국가권력이 사유화될 위기입니다. 사유화된 권력은 국민의 권리를 훼손하고 파괴할 것입니다. 독재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독재는 독재자가 자연사하기 전까지는 끝나지 않습니다. 판사들은 나라를 구할 힘이 없습니다. 판사들이 힘을 내도록 국민이 힘써야 합니다. 그래서 절박한 마음으로 이 책을 다음 말로 끝마칩니다.


공동의 것은 공동의 것으로, 국민의 것은 국민의 것으로." (28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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