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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앎의 근본이고, 앎의 지극함입니다.
此謂知本. 此謂 知之至也.
차위지본. 차위 지지지야.
보망장(補亡章)
근간에 정자의 뜻을 빌려서 이 내용을 보충하였다. “자신의 앎을 확충하는 것은 사물을 탐구하는 데 있다”고 하는 것은, 나의 앎을 확충하고자 한다면 사물에 나아가 그 이치를 탐구해야 함을 말한다. 대개 사람의 신령스러운 마음은 모든 것을 알 수 있고, 천하의 사물에는 모두 이치가 존재한다. 오로지 이치가 미처 탐구되지 않은 부분이 있기 때문에 그 앎이 다 드러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대학』에서 비로소 가르침을 베풀어서 배우는 사람들로 하여금 반드시 모든 천하의 사물과 맞부딪혀 자신이 이미 알고 있는 이치를 통해서 더욱 그것을 탐구하여 이로써 지극한 곳에 도달할 것을 추구한다. 오래도록 온 힘을 쏟다가 하루아침에 확 트여서 모든 것의 이치를 관통하게 된다면[豁然貫通] 모든 사물의 겉과 속 그리고 미세한 부분과 대략적인 부분 모두에 도달할 것이며, 내 마음의 온전한 모습과 커다란 작용이 드러나지 않음이 없을 것이다. 이것을 사물이 탐구되었다[格物]고 말하며 이것을 앎의 지극함[知之至]이라고 말한다.
所謂致知在格物者 言欲致吾之知 在卽物而窮其理也 蓋人心之靈 莫不有知而天下之物 莫不有理惟於理有未窮 故其知有不盡也 是以大學始敎 必使學者 卽凡天下之物 莫不因其已知之理 而益窮之以求至乎其極 至於用力之久 而一旦豁然貫通焉 則衆物之表裏精粗 無不到而吾心之全體大用 無不明矣 此謂物格 此謂知之至也
1.
앎과 대상의 문제이다. 대상을 통해서 앎이 확충되는가? 앎이 대상을 규정하는가? 대상을 알 수 있는가? 진리는 있는가? 넓게는 우주론과 인식론의 문제다. 여기서 성리학과 양명학이 갈린다. 성리학은 우주의 원리가 있으며, 그것이 바로 '이치[理]'라고 생각하는 객관론, 실재론으로 나아가고, 양명학은 우주의 원리는 없으며 내 마음이 바로 원리라고 생각하여 '마음[心]'의 주관론, 내면론으로 나아간다. (대강 그렇다는 이야기다.)
그리하여 중국역사 500면 동안 리학과 심학의 공존과 교체가 이어지고, 나중에는 다시 실증학으로 관심의 대상이 이동한다.
2.
도올 김용옥은 원래 <대학>에는 주희가 보충한 '보망장' 따위는 필요 없다고 말하며, 괜히 보망장을 만들어 결과적으로 불교의 직관적 깨달음(돈오설)과 유가적 내적 성찰의 길을 배제하는 결과를 낳았다고 비판한다. 한편 주희가 객관적 경험, 사물 탐구를 중시하는 바람에 격물(格物)과 치지(致知)의 상호변증법적 운동을 가로막고, 앎을 단일한 외적 사물탐구로 제한하여 동아시아 학문의 가능성을 좁히게 되었다고 말한다. (여기까지 읽고 무슨 말인지 아는 사람은 천재! 모르는 사람은 정상.^^)
3.
"똥인지 된장인지 찍어 먹어봐야 안다"라고 확신하는 사람은 찍어 먹어보면 된다. 하지만 왠지 께름직하여 똥일 것만 같은 사람은 직관을 믿고 안 찍어 먹는 것이 (정신) 건강에 이롭다. 우리는 마음으로 결정하고, 머리로 논리를 만들어내기도 하고, 뭔가 저지르고 합리화하기도 하는 불완전한 존재임에 틀림없다. 이성을 믿는 합리론자가 되었든, 이성 따위는 개나 줘버리고 경험만을 신뢰하는 경험론자가 되었든, 믿을 놈 하나도 없다고 생각하는 불가지론자나, 내가 아는 것이 무엇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라고 물으며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는 회의론자가 되었든, 죽지 않으려면 앎을 축적하여야 한다. 그리고 앎에 기초해서 선택하며 살 수밖에 없다. 나는 무엇에 근거하여 사는가? 사실인가, 믿음인가? 경험인가, 직관인가, 논리인가?
4.
불가에서는 마음으로 사물을 보면 반드시 고통을 낳으므로, 마음 없이, 머무는 바 없이, 있는 그대로 관찰하라고 말했다. 이 변화하고 비우는 관계론적 인식론과 실천론이 불교의 기본태도다. 주희는 송대를 지배하는 이 불가의 정신을 극복하고 싶었다. 그래서 그랬을까? 그는 사물의 근본원리를, 변하지 않는 원칙을, 숨어져 있는 비밀을 발견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주희가 성리학으로 넘어간 것을 지지하지는 않지만, 그의 성리학적 경도를 이해할 수는 있을 것 같다. (뭐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