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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파도 편지 16 : 이권택 할아버지

2025. 5. 25.

by 김경윤

1.

가파도에서 또 한 분의 노인이 돌아가셨습니다. 이권택 할아버지. 돌아가시기 전날까지도 멀쩡하게 마을사업 중 하나인 자전거대여소에서 일을 하셨습니다. 손이 다쳐서 모슬포에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으시고 가파도로 돌아오셨습니다. 그리고 그날 저녁 편안히 주무시다가 새벽에 돌아가셨습니다. 심장마비인 듯합니다. 다음날 아침 경찰과 과학수사대가 가파도를 방문하여 사인을 확인하고, 그날로 바지선에 시신이 실려 본섬으로 갔습니다. 오늘 아침, 많은 가파도 주민들이 첫배를 타고 문상을 갔습니다. 표정들이 평온했습니다. 잘 사시다가 편안하게 돌아가셨다고 말합니다.

1940년 3월 11일에 태어나서 2025년 5월 24일에 돌아가셨으니 오래 사셨습니다. 평소에 말이 별로 없었지만 자상하고 친절했습니다. 나에게 말을 붙여올 때는 사는 게 괜찮냐는 안부를 물었습니다. 나는 말없이 미소로 답했고 할아버지도 말없는 미소를 이해하시는 듯 조용히 웃으셨습니다. 바람이 거센 날에는 매표소 안으로 들어와 의자에 앉아 우두커니 바다를 바라보셨습니다. 아픈 아내를 자상하게 돌보셨습니다. 이제 남편이 먼저 저 세상으로 가셨으니 홀로 남은 아내가 걱정입니다.


2.

일요일이라 마을이 조용합니다. 원래 일요일은 주민들이 밖으로 나가지 않는데, 오늘은 주민의 반 이상 문상을 가서 그런지 더욱 조용합니다. 가파도를 찾아온 관광객도 많았지만, 단체손님이 많은지 매표소도 조용합니다. 이틀 전부터 읽고 있는 유시민의 <청춘의 독서>를 마저 읽었습니다. 이전에 읽었는데, 이번에 부천의 인문학 모임에서 같이 읽기로 해서, 새로운 특별증보판을 사서 다시 읽었습니다. 두 번째 읽어서 그런지 첫 번째 읽었을 때보다 감응은 덜 합니다. 마지막 원고로 증보한 밀의 <자유론> 편에서 내란과 탄핵 정국을 다루고 있어 시사적이지만, 그마저도 밋밋한 느낌입니다. 이 시기는 우리 모두가 너무 직접적으로 온몸으로 겪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3.

내일이면 한 달 만에 고양시로 올라갑니다. 귀가쫑긋 고전읽기반에서 진행하는 고전의 핵심 강좌를 진행해야 합니다. 이번에 다루고 있는 고전은 <맹자>입니다. 춘추전국시대, 전쟁의 와중에 인간을 믿고 사랑과 정의를 실현하는 정치를 주장하는 정치사상가가 맹자입니다. 그의 정치적 성향은 보수였지만, 그 성향마저 진보적(?)으로 취급받아 돌아다니는 나라마다 그를 거부했습니다. 그는 당대에는 실패한 보수주의자였습니다. 이 주간에 사전투표가 이루어집니다. 나는 금요일이 휴일이라 병원에도 갈 겸, 사전투표를 할 계획입니다.


4.

따져보니 한 달 만에 쓰는 편지네요. 나는 5월 달에 책 2권의 원고를 마무리했고, 강좌 6개를 소화했습니다. 가파도에 내려와서도 개버릇 남 못 준다고 나는 책 읽고 책 쓰고 강의하는 루틴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이 루틴이 나를 지켜줍니다. 중들이 왜 매일 아침 예불을 드리는지 알 것 같습니다. 일상의 행불행이 우리의 마음에 격랑을 만들고 바람을 일으키지만, 비바람 몰아치고 파도가 들이닥쳐도 바위가 그 자리를 굳건하게 지키는 것처럼 우리의 좋은 루틴이 우리를 지켜줄 거라 믿습니다.


가파도는 청보리가 황보리로 익어가고, 가자니아, 금잔화, 달맞이꽃이 활짝 피었습니다. 보러 오실래요? 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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