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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파도 편지 19 : 안개

2025. 6. 21.

by 김경윤

1.

가파도에는 안개가 잔뜩 끼어 이틀 동안 배가 뜨지 않았습니다. 인생 오리무중(五里霧中)이라 한 치 앞도 내다보지 못한다더니, 여기 날씨가 딱 그 꼴입니다. 노동을 해야 하는 날에 공치니 기분이 좋지는 않습니다. 그렇다고 하늘을 원망할 수는 없습니다. 내 마음을 조절해야 합니다. 오랜만에 푹 쉬는 시긴이라 밀린 독서를 했습니다. 이탈리아 과학자 카를로 로벨리의 <무엇도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와 머리나 밴줄렌의 <창조적 영감에 대하여 : 천천히 사유할 때 얻는 진정한 통찰의 기쁨>을 읽었습니다. 앞의 책은 별 다섯 개를 주고, 뒤의 책은 별 세 개를 줍니다.


2.

오늘도 안개가 끼어 공쳤나 싶었는데, 오후 2시 배부터는 배가 뜹니다. 3시간이라도 노동하게 되었습니다. 시급인생이라 벌이는 신통치 않지만, 매표소에 앉아 근무를 하는 것만으로도 일상이 회복되는 기분입니다. 급하게 처리해야 할 업무를 마치고, 7월 초에 대정읍의 '독서의 입구' 서점에서 강연할 <가파도에서 읽은 노자와 장자>의 원고를 정리해서 보냈습니다. 송악도서관, 대정중학교에 이어 제주도에서 진행하는 세 번째 인문학 강좌입니다.


세 번의 강좌 중 첫 강좌는 가파도에 와서 글을 쓰고 있는 안상학 시인형이 열어주고, 나머지 두 강좌를 제가 맡았습니다. 제주도에서도 워낙 지방(?)이라 모객이 쉽지 않다고 주최 측에서 걱정합니다. 그 걱정은 주최 측에서 맡기고, 나는 몇 명이 참석하든 최고의 강의를 보여주기 위해 프로그램을 다듬습니다. 한 명이 오더라도 백 명처럼 귀하게 여기고, 백 명이 오더라도 한 명에게 강의하듯 집중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3.

안개가 다시 몰려옵니다. 가파도의 안개는 비와 함께 와서 오랫동안 머물다 떠납니다. 김승옥의 <무진기행>의 분위기를 자아내어 신비합니다. 바람이라도 시원하게 불어야 이 안개가 걷힐 텐데, 안개가 끼는 날은 바람도 잔잔하여 축축함과 눅눅함이 더합니다. 이 눅눅함이 마음속으로 들어와 전염될까 봐 일부러 밝은 노래를 틀어봅니다. 거기는 어떤가요? 거기에도 비가 오나요? 안개가 끼나요? 바람이 부나요?


<추신>

컴퓨터의 배경화면을 바꿨습니다. 사계절 출판사에서 <노자, 가파도로 가다>(가제) 작업을 하면서 보내온 시안 중 마음에 드는 그림을 골라 베경화면으로 삼았습니다. 미완성 작품이지만 기분이 화사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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