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정은 에세이 (창비, 2025)
읽을 책을 고르려고 책장을 넘기다가 우연히 본 문장. “연결성이라는 사슬로 이어져 모두가 동등하다.” 나도 이런 말을 쓰고 싶다. 이런 시선과 마음으로 세상을 보고, 인간을 향해 돌돌 구부러드는 생각은 접어두고, 보고 듣는 것만을, 찰나의 생각만을 기록하며, 삶이 내게 주는 감각을 편견 없이 흠뻑 음미하고, 그렇게 살고, 쓰고 싶다. 그런데 자꾸 더러워진다. 산다는 건 결국 더러워진다는 것이지만, 더러운 도랑물을 마시며 사는 것이지만,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이미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다른 물줄기, 다른 삶에서 내 삶으로 흘러드는 물을, 타인의 삶에서 흘러나온 피가 스며든 도랑의 물을 내 도랑의 물로 받아 마시며 사는 일이고, 그래서 내가 받아들이거나 말거나 삶이란 끊임없이 더러워지는 일이지만.
이런 오염은 싫다.
이름들을 기록해두고 싶다.
윤석열, 한덕수, 최상목, 심우정, 이제 지귀연.
- 114~5쪽
1.
주말에 유튜브 라디오 <더 뷰티플>을 보지 않았다면, 거기서 <작은 일기>를 소개하지 않았다면, 소개된 문장이 나의 심장을 두드리지 않았다면, 휴일에 들른 동네서점에 <작은 일기>가 없었다면, 나는 이 책을 읽지 않았을(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너무 우연히 모든 것이 맞아떨어져 나는 황정은의 <작은 일기>를 샀고, 순식간에 읽었다. 계엄으로부터 시작하여 탄핵으로 이어지기까지 한 작가가 동시대인과 겪었던 행동과 마음이 고스란히 황정은스럽게 담겨 있었다. 읽으며 타임머신을 탄 듯 과거의 그 시간으로 돌아가 나의 역사와 겹쳤다. 나는 얼마나 많은 고통과 불안과 불면의 시간을 보냈던가? (새로운 대통령이 선출되고 나서 100일이 지났음에도 이 고통은 끝나지 않았다. 이 얼마나 황당한 시절인가?)
2.
책소개하는 코너에 이 책을 이렇게 소개했다. "전작 『일기日記』(창비 2021) 이후 4년 만에 선보이는 이번 에세이집은, 현직 대통령의 계엄령 선포라는 초유의 사태 이후를 배경으로 삼는다. 요동치는 격랑의 시간 속에서 작가는 매일의 삶을 일기로 기록하며 광장과 집 안, 거리와 책상 앞을 쉼 없이 오갔다. 이 책은 우리 가장 어두운 날들을 견디며 지켜낸 생활과 사유, 그 가운데 가만히 솟아오른 깊은 마음을 담아낸 ‘생활의 기록’이자 ‘시대의 문장’이다."
나도 그 시기에 하루가 멀다 하고 일기를 썼다. 그러나 황정은의 일기는 나의 일기와 현장성에서 갈라진다. 나는 가파도에서 안타까운 마음으로 그 현장을 지켜보았고, 황정은은 직접 그 현장으로 달려가 그 현장을 겪었다. 겪은 몸과 바라보는 몸. 그 몸의 차이가 문장의 차이를 만들어낸 것일까? 나는 결코 다음과 같은 문장을 쓸 수 없다.
"그 추운 밤을 그 자리에서 보낸 사람들도 놀랍고, 그들에게 난방 버스며 음식이며, 바람 넘는 고개에서 버티는 데 도움이 되는 물품들을 즉시 보낸 사람들도 놀랍다. 그건 나라에서 받은 것이 없어도 위기가 닥치면 들불같이 일어난다는 어느 민족의 성격 같은 것이라기보다는 남의 곤경과 고립을 모르는 척 내버려 두거나 차마 두고 갈 수는 없는 마음들 아닐까. 남의 고통을 돌아보고, 서로 돌볼 줄 아는 마음들." - 58쪽
3.
<작은 일기>를 읽으며, 황정은을 응원하는 마음이 생겼고, 나의 독서 리스트를 늘렸고, 일기에 소개된 음악을 유튜브에서 찾아 듣기도 했다. 인식의 지형은 이렇게 넓혀지고 깊어진다. 그게 독서가 주는 힘이자 은총이라고 나는 믿는다. 황정은의 '작은 마음'이 나에게 '큰 마음'으로 가다 온다.
황정은은 시몬 베유의 문장을 인용한다. "그는 열렬히 그러나 저급하게 사랑한다"는 말은 가능하다. "그는 깊이 그러나 저급하게 사랑한다"는 말은 불가능하다.
그리고 황정은 다음과 같이 적는다. 내가 이 세계를 깊이 사랑한다. (172쪽)
4.
황정은은 일기 말미에 조희대의 이름을 추가했다. 황정은의 작품을 찾아 읽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