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리히 프롬, <사랑의 기술>
우리는 인생에서 중요한 무언가를 얻고자 할 때, 당연히 시간과 노력을 들여 배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피아노를 배우기 위해 학원에 등록하고, 좋은 직업을 갖기 위해 밤새워 공부합니다. 그런데 유독 ‘사랑’에 대해서만큼은 태도가 완전히 다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랑이란 배우는 것이 아니라, 어느 날 운명처럼 ‘찾아오는 것’ 혹은 ‘빠지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마치 복권 당첨처럼, 그저 행운이 찾아오기만을 막연히 기다릴 뿐입니다.
독일 출신의 세계적인 사회심리학자 에리히 프롬(Erich Fromm)은 그의 기념비적인 저서 『사랑의 기술(The Art of Loving)』 서두에서, 바로 이 지점이 현대인이 사랑에 실패하는 근본적인 원인이라고 날카롭게 지적합니다.
“사랑처럼 엄청난 희망과 기대 속에서 시작되었다가 반드시 실패로 끝나고 마는 활동이나 사업은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다. (…) 이러한 실패에도 불구하고 사랑의 기술을 배우려는 노력은 왜 거의 없는 것일까? (…) 사람들은 사랑의 문제를 ‘사랑하는’, 곧 사랑할 줄 아는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사랑받는’ 문제로 생각한다.”
- 에리히 프롬, 『사랑의 기술』 중에서
프롬은 단호하게 선언합니다. 사랑은 기술(Art)이다. 여기서 ‘기술’은 기계적인 테크닉이 아니라, 화가나 음악가가 연마하는 ‘예술’에 더 가까운 의미입니다. 만약 사랑이 예술이라면, 다른 모든 예술과 마찬가지로 이론을 배우고 실천을 통해 끊임없이 연마해야만 합니다. 오늘 우리는 사랑이라는 위대한 예술을 배우는 첫걸음으로, 왜 우리가 그토록 사랑을 배우는 데 인색했는지에 대한 프롬의 진단을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프롬은 사람들이 사랑을 배워야 할 기술로 여기지 않는 세 가지 뿌리 깊은 착각이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다고 말합니다. 이 세 가지 착각은 오늘날 우리의 연애 현실을 너무나 정확하게 반영하고 있어서, 마치 21세기의 우리를 위해 쓰인 글처럼 느껴질 정도입니다.
첫째, 사람들은 ‘사랑하는 것’이 아닌 ‘사랑받는 것’에만 몰두합니다. 프롬은 이 문제를 남성과 여성의 전통적인 역할에 빗대어 설명합니다. 과거 남성들은 ‘성공’을 통해, 여성들은 ‘외모’를 가꾸는 것을 통해 사랑받을 만한 매력을 획득하려 했다는 것입니다. 시대는 변했지만 본질은 같습니다. 어떻게 하면 더 매력적인 사람이 될까, 어떻게 하면 인기 있는 사람이 될까, 어떻게 하면 ‘사랑받을 만한 상품’이 될까에만 온 신경을 집중합니다. 외모를 가꾸고, 유머를 배우고, 좋은 직장에 들어가고, 비싼 차를 사는 것 모두 ‘사랑의 시장’에서 자신의 상품 가치를 높이려는 노력의 일환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사랑의 ‘주체’가 되는 법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시장에서 선택받으려는 수동적인 ‘대상’이 되려는 태도에 불과합니다.
둘째, 사람들은 사랑이 ‘능력’의 문제가 아닌 ‘대상’의 문제라고 착각합니다. “아직 내게 맞는 사람을 못 만났을 뿐이야”, “더 괜찮은 사람이 나타나면 나도 진짜 사랑을 할 수 있을 텐데”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현대의 소비문화가 낳은 환상이라고 프롬은 지적합니다. 마치 쇼핑하듯, 수많은 대상들 중에서 ‘최고의 상품(The right object)’을 고르기만 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 믿는 것입니다. 데이팅 앱에서 수많은 프로필을 넘기며 ‘최적의 대상’을 찾으려는 현대인의 모습은 이러한 착각의 정점에 있습니다. 그러나 프롬은 사랑할 줄 아는 능력이 부재한 것이 문제의 핵심이라고 말합니다. 최고의 악기가 있어도 연주법을 모르면 소음을 낼 뿐이듯, 아무리 멋진 대상을 만나도 사랑할 줄 아는 능력이 없다면 관계는 파국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습니다.
셋째, 사람들은 ‘사랑에 빠지는(falling in love)’ 최초의 강렬한 경험과 ‘사랑을 지속하는(standing in love)’ 상태를 혼동합니다. 처음 만난 두 사람이 서로의 벽을 허물고 하나가 되는 듯한 황홀한 합일의 순간. 이 짜릿한 경험은 고독이라는 감옥에 갇혀 있던 인간에게는 엄청난 해방감을 줍니다. 우리는 이 강렬함이 사랑의 전부라고 믿기 때문에, 그 감정이 옅어지고 익숙해지면 “사랑이 식었다”고 단정하고 관계를 쉽게 포기해버립니다. 하지만 프롬에게 이것은 사랑의 서막에 불과하며, 진정한 사랑의 기술은 그 감정의 파도가 지나간 뒤에 관계라는 집을 꿋꿋하게 ‘지속’시키는 능력에서 발현됩니다. ‘빠지는 것’은 중력처럼 수동적이지만, ‘지속하는 것’은 중력을 거스르는 것처럼 능동적인 의지를 필요로 합니다.
그렇다면 프롬이 말하는 ‘사랑의 기술’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그는 막연한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의식적으로 실천해야 할 네 가지 능동적인 요소가 있다고 말합니다. 이 네 가지 요소는 분리되어 있지 않고, 하나의 유기체처럼 연결되어 성숙한 사랑을 구성합니다.
“사랑은 사랑하고 있는 자의 생명과 성장에 대한 적극적인 관심이다. (…) 사랑은 책임, 존경, 지식과 마찬가지로 보호를 내포하고 있다.”
- 에리히 프롬, 『사랑의 기술』 중에서
1. 보호(Care): 사랑의 가장 기본적인 표현입니다. 사랑하는 존재의 생명과 성장에 대한 적극적인 관심이죠. 우리가 아끼는 화초에 물을 주고 햇볕을 쬐어주지 않으면서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듯, 연인의 안녕과 성장에 무관심하다면 그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닙니다. “오늘 힘든 일은 없었어?”라는 따뜻한 질문, 아플 때 끓여주는 죽 한 그릇, 그가 꿈을 향해 나아갈 때 보내주는 진심 어린 응원. 이 모든 것이 ‘보호’의 구체적인 실천입니다.
2. 책임(Responsibility): 많은 사람들이 ‘책임’을 외부에서 주어진 무거운 의무라고 생각하지만, 프롬에게 책임은 자발적인 행위입니다. 책임(responsibility)의 어원은 ‘응답하다(respond)’입니다. 즉, 책임이란 상대방이 표현하거나 표현하지 않은 요구에 ‘응답할 준비’가 되어 있는 능동적인 자세입니다. 힘들어하는 연인의 이야기를 밤새 들어주고, 그의 정신적, 감정적 필요를 알아차리고 기꺼이 반응하는 것이 책임의 본질입니다. 이것은 의무가 아니라, 사랑하기 때문에 기꺼이 선택하는 응답입니다.
3. 존경(Respect): ‘존경’ 역시 수동적인 경외감이 아닙니다. 라틴어 어원(respicere)은 ‘바라보다, 주시하다’라는 뜻입니다. 즉, 존경이란 상대방을 내 마음대로 바꾸거나 지배하려는 욕심 없이,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보고 그가 그 자신의 방식대로 성장하고 발전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상대방을 나의 필요를 채우기 위한 대상(그것, It)이 아닌, 고유한 인격체 그 자체로 바라보는 것이 존경의 시작입니다. 나와 다른 취미나 생각을 비난하지 않고 인정해주는 것, 그의 선택을 믿고 기다려주는 것이 바로 ‘존경’입니다.
4. 지식(Knowledge): 존경과 깊이 연결된 요소입니다. 상대방을 존경하지 않으면 결코 그를 알 수 없습니다. 여기서 지식은 단순히 상대의 신상 정보를 아는 피상적인 층위가 아닙니다. 나의 시선으로 상대를 판단하고 분석하는 것을 넘어, 상대방의 입장에서 그의 감정과 경험을 느끼려는 ‘공감적 이해’입니다. 상대의 피상적인 모습 너머에 있는 그의 불안과 용기, 어린 시절의 상처와 숨겨진 꿈, 그 내면의 핵심을 꿰뚫어 아는 것이 진정한 ‘지식’입니다.
프롬의 가르침은 우리에게 충격적인 깨달음을 줍니다. 사랑은 운명에 내맡기는 수동적인 감정이 아니라, 끊임없이 배우고 실천해야 하는 능동적인 기술이라는 것. 순간의 설레는 감정은 사랑의 시작일 뿐, 그 관계를 예술 작품처럼 아름답게 완성해나가는 것은 결국 우리의 의지적인 실천에 달려있다는 것입니다.
프롬은 말합니다. “사랑은 궁극적으로 의지의 행위이며, 결단이다. 만일 사랑이 단지 감정이라면, 영원히 서로 사랑하겠다는 약속은 아무런 근거가 없다. 감정은 오고 가는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