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십계명 10 : 사랑하라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을 중심으로

by 김경윤

드디어 인문학의 마지막 계명인 ‘사랑하라’에 왔군요. 가벼운 마음으로 시 하나 읽고 시작해보지요. 장정일의 시인데요. 김춘수의 시 <꽃>을 패러디한 것입니다. 제목은 <라디오 같이 사랑을 끄고 켤 수 있다면 - 김춘수의 꽃을 변주하여>.


내가 단추를 눌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라디오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단추를 눌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전파가 되었다.

내가 그의 단추를 눌러 준 것처럼

누가 와서 나의

굳어버린 핏줄기와 황량한 가슴 속

버튼을 눌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전파가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사랑이 되고 싶다.

끄고 싶을 때 끄고 켜고 싶을 때 켤 라디오가 되고 싶다


현대인의 인스턴트식 사랑을 노래한 이 시는 현대인의 사랑은 마치 라디오의 채널처럼 쉽게 선택가능하고, 심지어는 아예 만남과 이별 또한 자유로운 상태인 것처럼 보입니다. ‘번개팅’이라는 말이 이제는 일상어가 되어있을 정도이니, 순간적 쾌락을 추구하는 것 또한 눈살 찌푸릴 일은 아닌 가 봅니다. 싸이의 <강남스타일>의 대사처럼 “지금부터 갈 때까지 가볼까?”라는 제의는 타락의 징표라기보다는 도시적 쿨(cool)함의 표시이지요.

사랑은 인류가 상상하고 숙고해온 가장 오래된 주제입니다. 시대와 조건과 맥락에 따라 각기 다른 사랑을 이야기했지만 말이에요.

이번에 우리가 읽고 명상할 텍스트는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입니다. 에리히 프롬(Erich Fromm, 1900~1980)은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태어나, 프랑크푸르트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했으나, 1919년에 하이델베르크 대학으로 옮기면서 전공을 사회학으로 바꿉니다. 1920년대 중반에는 프리다 라이히만의 정신분석 치료소에서 정신분석 전문의가 되기 위한 수련을 받았으며, 1930년에는 베를린에서 자신의 진료소를 개업했지요. 1930년에 프랑크푸르트 사회연구소에 들어갔으나, 이 연구소가 나치 정권에 의해 폐쇄당하자, 1933년에 시카고 정신분석연구소의 초청을 받고 미국으로 건너가 망명했으며, 이듬해에 사회연구소가 뉴욕의 컬럼비아 대학에 부설되자 프롬도 뉴욕으로 옮깁니다. 이후로 프롬은 사회학과 정신분석학을 결합시켜서 자신만의 고유한 학문세계를 넓혀갑니다. 저서로는 《자유로부터의 도피》(1941) 외에 《주체적 인간》(1947), 《건전한 사회》(1955), 《사랑의 기술》(1956), 《선(禪)과 정신분석》(1960), 《환상의 사슬을 넘어서》(1962), 《인간의 마음》(1964), 《희망의 혁명》(1968), 《소유냐 존재냐》(1976) 등이 있지요.


사랑도 기술이다?


사랑을 ‘기술’이라고 말하면, 직관적으로 떠오르는 것은 ‘카사노바’나 ‘제비족(또는 꽃뱀족)’이죠? ‘기술’이라는 말속에는 뭔가 순수하지 않은 비인간적인 냄새가 나지 않나요? 그에 비해 ‘첫눈에 마주친 사랑’이라든지, ‘불꽃같은 사랑’이라는 말은 사랑의 속성을 더욱 잘 반영하고 있는 것 같지 않나요? 그럼에도 에리히 프롬의 자신의 저서의 제목을 『사랑의 기술(the Art of Loving)』이라고 붙였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오히려 되묻습니다. “우리 문화권의 사람들은 사랑의 경우 명백히 실패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사랑의 기술을 거의 배우려고 하지 않는가?”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에 대한 뿌리 깊은 갈망에도 불구하고 사랑 이외의 거의 모든 일, 곧 성공, 위신, 돈, 권력이 사랑보다도 더 중요한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우리들의 거의 모든 정력이 이러한 목적에 사용되고 거의 모든 사람들이 사랑의 기술을 배우려고 하지 않는다.

돈을 벌거나 특권을 얻는데 필요한 것만이 배울 만한 가치가 있다면, 오직 영혼에 유익할 뿐 현대적 의미에서는 아무런 이익도 없는 사랑은 우리가 대부분의 정력을 기울일 필요가 없는 사치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프롬의 충고에 따라, 사랑에 성공하려면 우리는 우선 사랑이 기술임을 인정할 필요가 있겠네요. 그럼 사랑의 기술은 어떻게 습득할 수 있을까요? 프롬의 글에 따르면 사랑의 기술 역시 “다른 기술 예컨대 음악이나 그림이나 건축 또는 의학이나 공학의 기술을 배우려고 할 때 거쳐야 하는 것과 동일한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론과 실천의 습득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더 나아가 “이론과 실천의 습득 이외에도 어떤 기술에 숙달하는데 필수적인 세 번째 요인이 있다. 곧 기술 숙달이 궁극적인 관심사로 되어야 한다. 이 말은 음악에도, 의학에도, 건축에도, 그리고 사랑에도 해당된다”라고 말합니다. 말인 즉, 사랑을 사랑 그 자체로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지, 무엇 무엇 때문에 사랑에 관심이 있다고 생각해선 안 된다는 이야기지요. 그러고 보니 마르크스도 이와 유사한 말을 했네요.

“인간을 인간으로서 생각하고 인간과 세계의 관계를 인간적 관계로 생각하라. 그러면 당신은 사랑에는 사랑으로써만, 신뢰에는 신뢰로써만 교환하게 될 것이다. 예술을 감상하려고 한다면 당신은 예술적 훈련을 받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 다른 사람들에 대해 영향력을 갖고 싶다면, 당신은 실제로 다른 사람을 격려하고 발전시키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 만일 당신이 사랑을 일깨우지 못하는 사랑을 한다면, 곧 당신의 사랑이 사랑을 일으키지 못한다면, 만일 사랑하는 사람으로서의 생명의 표현에 의해서 당신 자신을 사랑받는 자로 만들지 못한다면 당신의 사랑은 무능한 사랑이고 불행이 아닐 수 없다.”


사랑의 사회사


프롬이 이야기하는 사랑의 이론 습득을 위해서는 사회학적 접근을 통과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프롬이 이야기하는 사랑은 모든 인류에게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사랑이 아니라, 각 시대마다 다르게 구성되는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 시대의 사랑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자본주의적 사랑을 알아야 합니다. 이러한 프롬의 접근방식은 우리가 자칫 빠지기 쉬운 사랑의 감상주의적 접근을 경계하면서, 시대에 맞는 구체적 해결을 찾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지요.


자본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을 예로 들어봅시다. 현대인은 개성은 자본주의적 소비를 통해서 주로 실현되지요. 남들과는 다른 상품을 소유하고 있다는 착각이 바로 그러한 사례입니다. 평등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남녀평등권에 대한 프롬의 글을 볼까요?


남자와 여자는 대립적인 극으로서 평등한 것이 아니라 동일하게 되었다. 현대 사회는 이러한 비개성화된 평등이라는 이상을 설교하고 있다. 현대 사회는 인간에게 대집단 속에서 마찰 없이 원활하게 일하도록 서로 동일한 원자적 인간이 되기를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모두 동일한 명령에 복종하면서도 각기 자신의 욕망에 따르고 있다는 확신을 갖게 하는 것이다. 현대의 대량 생산이 상품의 규격화를 요구하는 것처럼 사회적 과정은 인간의 표준화를 요구하고 이러한 표준화를 평등이라고 한다.


몰개성화된 개성과 평등, 상품경제의 틀에 맞춰 표준화된 인간이 되어버린 자본주의 사회에게 진정한 개성이란 있는 것일까요? 이러한 사회 속에서 진정한 사랑을 추구할 수 있을까요? 진정한 사랑이라면 적어도 몰개성화되고 파편화된 사랑, 표준화된 사랑은 아니겠지요. 프롬은 말합니다.


성숙한 사랑은 자신의 통합성, 곧 개성을 유지하는 상태에 있어서의 합일이다. 사랑은 인간에 있어서 능동적인 힘이다. 곧 인간을 동료로부터 분리시키는 벽을 허물어 버리는 힘, 인간을 타인과 결합시키는 힘이다. 사랑은 인간으로 하여금 고립감과 분리감을 극복하게 하면서도 각자에게 각자의 특성을 허용하고 자신의 통합성을 유지시킨다. 사랑에 있어서는 두 존재가 하나로 되면서도 둘로 남아 있다는 역설이 성립한다.


불가적 표현을 빌자면, 불일불이(不一不二)라고 할까요. 하나이면서 둘인 상태, 자신의 통합성(개성)을 유지하면서 능동적인 힘으로 고립감과 분리감을 극복하여 하나가 된 상태가 바로 성숙한 사랑입니다.

여기서 ‘능동적 힘’이라는 말도 중요한데요. 이 ‘능동적 힘’은 ‘수동적 감정’과는 다르지요. 그래서 프롬은 사랑을 이렇게 표현하기도 했지요. “사랑은 수동적 감정이 아니라 활동이다. 사랑은 참여하는 것이며 빠지는 것은 아니다. 가장 일반적인 방식으로는 사랑은 원래 주는 것이지 받는 것이 아니라고 말함으로써 사랑의 능동적 성격을 설명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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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대한 오해


프롬이 이야기하는 사랑의 성격을 파악하기 위해서, 우선 사랑에 대한 오해부터 하나하나 제거해 나가 봅시다. 우리는 흔히 사랑을 위대한 희생이라고 생각해요. 어머니의 사랑하면, 무조건적이고 헌신적인 희생을 떠올리게 되지요. 과연 사랑은 희생일까요? 프롬은 아니라고 말하네요.


가장 광범하게 퍼져 있는 오해는 준다는 것은 무엇인가를 포기하는 것, 빼앗기는 것, 희생하는 것이라는 오해이다. 그 성격이 받아들이고 착취하고 혹은 저장하는 방향으로 나가는 단계를 넘어서지 못한 사람은 준다고 하는 행위를 이러한 방식으로 경험한다. 시장형의 성격은 주려고 하지만 단지 받는 것과 교환으로 줄 뿐이다. 그에게는 받는 것 없이 주기만 하는 것은 사기당하는 것이다.


희생은 자기 것이 없는 것을 뜻하지요. 그런 점에서 포기하고, 빼앗기는 것과 같은 성격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그렇다면 프롬은 사랑이 마치 교환처럼 주고받은 것이라고 말하고 싶은 것일까요? “내가 이만큼 줬으니 너도 이만큼은 줘야 한다” 뭐 이런 것일까요? 그것은 사랑의 ‘줌’의 성격을 착각하고 있는 것이라고 프롬은 말합니다. 프롬에 따르면 사랑을 줌은 소비가 아니라 오히려 생산에 가깝지요. 주는 것은 손해를 보고 고통스럽지만 감수해야만 하는 희생이 아니라,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잠재적 능력의 최고의 표현입니다. 따라서 사랑의 줌은 주면 줄수록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라 기쁨을 느끼게 되지요.


생산적인 성격의 경우, 주는 것은 전혀 다른 의미를 갖는다. 주는 것은 잠재적 능력의 최고의 표현이다. 준다고 하는 행위 자체에서 나는 나의 힘, 나의 부, 나의 능력을 경험한다. 고양된 생명력과 잠재력을 경험하고 나는 매우 큰 환희를 느낀다. 나는 나 자신을 넘쳐흐르고 소비하고 생동하는 자로서, 따라서 즐거운 자로서 경험한다. 주는 것은 박탈당하는 것이 아니라 준다고 하는 행위에는 나의 활동성이 표현되어 있기 때문에 주는 것은 받는 것보다 더 즐겁다.


사랑에 대한 두 번째 오해는, 그렇다면 “주기 위해서는 부자가 되어야 한다”는 오해입니다. 과연 부자가 되면 많은 것을 줄 수 있을까요? 오히려 부자들은 탐욕에 사로잡혀 주기보다는 남의 것을 빼앗는 것을 더 즐기지 않을까요? 오히려 가난한 사람들이 더 잘 주는 것은 아닐까요? 이런 맥락에서 프롬은 부자에 대한 정의를 다르게 내립니다. “많이 갖고 있는 자가 부자가 아니다. 많이 주는 자가 부자이다. 하나라도 잃어버릴까 안달을 하는 자는 심리학적으로 말하면 아무리 많이 갖고 있더라도 가난한 사람, 가난해진 사람이다. 자기 자신을 줄 수 있는 사람은 누구든지 부자이다.”


사랑에 대한 세 번째 오해는, “사랑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물질적인 뭔가가 필요해”라는 오해입니다. 젊은이들이 사랑을 할 때, 만난 지 10일, 100일, 200일, 1년을 챙기면서 선물을 하는 새로운 풍습을 보면 이러한 오해가 더욱 강화되는데요. 프롬은 준다는 것의 가장 중요한 영역은 물질적 영역이 아니라 인간적인 영역이라고 강조합니다. 그것을 프롬은 생명을 준다고 표현합니다.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주는 것은 무엇인가? 그는 자기 자신, 그가 갖고 있는 것 중 가장 소중한 것, 다시 말하면 생명을 준다. 이 말은 반드시 남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희생한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자기 자신 속에 살아 있는 것을 준다는 뜻이다. 그는 자신의 기쁨, 자신의 관심, 자신의 이해, 자신의 지식, 자신의 유머, 자신의 슬픔 -자기 자신 속에 살아 있는 것의 모든 표현과 현시를 주는 것이다. 이와 같이 자신의 생명을 줌으로써 그는 타인을 풍요하게 만들고, 자기 자신의 생동감을 고양함으로써 타인의 생동감을 고양시킨다. 그는 받기 위해서 주는 것이 아니다. 주는 것 자체가 절묘한 기쁨이다.


그렇게 생명을 줄 때, 다른 사람 역시 주는 자가 되고, 두 사람 모두 생명을 탄생시키는 기쁨에 참여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프롬은 “사랑은 사랑을 일으키는 힘이고 무능력은 사랑을 일으키는 능력이 없다는 뜻이다”라고 말하지요.


사랑의 요소 : 보호, 책임, 존경, 지식


프롬은 사랑의 능동적 성격은 주는 것 외에도 보호, 책임, 존경, 지식 등의 기본적 요소가 있다고 말합니다.


우선 보호. 모성애에서 가장 두드려지게 나타나는 이 보호라는 요소는 인간뿐만 아니라 동물들에게도 흔히 확인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말로만 사랑한다고 하면서 사랑하는 대상을 보호하지 않는 사랑을 믿지 않습니다. 프롬은 “꽃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꽃에 물을 주는 것을 잊어버린 여자를 본다면, 우리는 그녀가 꽃을 사랑한다고 믿지 않을 것이다. 사랑은 사랑하고 있는 자의 생명과 성장에 대한 우리들의 적극적 관심인 것이다. 이러한 적극적 관심이 없으면 사랑도 없다.”도 단언합니다.


다음으로 책임. 책임은 흔히 외부에서 부과되는 것이라고 착각하기 쉽습니다. 그렇지만 책임의 진정한 의미는 전적으로 자발적이며 주체적인 것이지요. 책임은 영어로 ‘responsibility’라고 합니다. 풀어 설명해보면, ‘응답할 수 있는(response) + 능력(ability)’이지요. 프롬도 이 의미에 주목합니다. “책임은 다른 인간 존재의 요구 -표현되었든, 표현되지 않았든-에 대한 나의 반응이다. 책임을 진다는 것은 응답할 수 있고, 응답할 준비가 갖추어져 있다는 뜻이다.”


세 번째로 존경. 만약에 사랑에 존경이 없다면 “책임은 쉽게 지배와 소유로 타락할 것”이라고 프롬은 경고합니다. 프롬은 존경(respect)이라는 말의 어휘에 주목합니다. “존경은 두려움이나 외경은 아니다. 존경은 이 말의 어원(respicere=바라본다)에 따르면 어떤 사람을 있는 그대로 보고 그의 독특한 개성을 아는 능력이다.” 프롬이 쓴 『소유냐 존재냐』의 용어를 빌어 표현해보자면, 사랑은 그 사람을 그 ‘존재’ 자체로 보는 것이지, 자신의 ‘소유’로 보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랑은 상대방을 구속하거나 지배하지 않습니다. “존경은 오직 자유를 바탕으로 해서 성립될 수 있다. 프랑스의 옛 노래가 노래하듯 사랑은 자유의 소산이며 결코 지배의 소산”이 아닙니다.


마지막으로 지식. 소크라테스는 종종 델포이 신전에 새겨진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을 했습니다. 이 말의 진정한 의미는 “너의 지식은 언제나 불충분하며, 불완전하며, 결국 너는 무지하다는 것을 깨달으라”는 이야기지요. 이처럼 인간의 지식은 늘 불충분합니다. 그러기에 프롬은 사고에만 의존하지 말고 실천하라고 말합니다.

“충분한 지식을 얻는 유일한 길은 사랑의 행위에 있다. 이 행위는 사상을 초월하고 언어를 초월한다. 사랑의 행위는 대담하게 합일의 경험으로 뛰어드는 것이다. 그러나 사고에 의한 지식, 곧 심리학적 지식은 사랑의 행위에 있어서 충분한 지식을 위해 불가결한 조건이다. 다른 사람의 실상을 보기 위해서는 오히려 내가 그에 대해 갖고 있는 환상, 곧 불합리하게 일그러진 상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나는 다른 사람과 나 자신을 객관적으로 알아야 한다. 인간을 객관적으로 알게 될 때에만 사랑의 행위를 통해서 나는 인간을 궁극적 본질에 있어서 알 수 있다.”


이 네 가지 요소를 종합적으로 고려해보건대, 사랑은 상대방을 보호하고 책임지되, 상대방을 소유하거나 지배해서는 안 되고, 오히려 상대방을 존경하고, 상대방에 대해 자신이 갖고 있는 오해나 편견을 버리고 객관적으로 바라보아야 함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말은 쉬운 것 같지만, 현대인에게 실천하기 매우 어려운 것들입니다. 자본주의적 소유욕에 사로잡힌 현대인들은 사랑을 하더라도 소유의 관점에 입각하기 때문입니다. 주기보다는 받기를 바라고, 그 정도는 아니더라도 주는 만큼은 받기를 바라는 것이 인지상정이라고 생각하지요, 그래서 부모는 자녀를 자신이 원하는 대로 조절하여 소유하려고 하고, 애인들은 상대방을 자신이 원하는 모습으로 바꾸려고 합니다. 주는 것이 많은 만큼, 더욱더 소유에 대한 집착도 강해지는 것이지요. 프롬이 보기에 이러한 자본주의적 소유관계에 입각해져 보이지는 사랑은 결국 사랑의 참다운 의미를 잃고, 자신뿐만 아니라 상대방도 파괴하는 결과를 초래한다고 보았습니다.


이기심과 자기애


우리는 일상적으로 이기심과 자기애를 명확하게 구별하여 사용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프롬에 의하면 이기심과 자기애는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소유의 관점을 드러내는 것이 이기심이라면, 존재의 관점을 드러내는 것이 자기애이지요. 이기적인 사람에 대하여 프롬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이기적인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만 관심이 있고 모든 것을 자기 자신을 위해 원하며 주는 데에서는 기쁨을 느끼지 못하고 받는 데에서만 기쁨을 느낀다. 그는 거기서 무엇을 얻어 낼 수 있는가 하는 관점에서만 외부 세계를 본다. 그는 다른 사람의 욕구에는 흥미가 없고 다른 사람의 존엄성과 통합성을 존중하지 않는다. 그는 오직 자기 자신만을 생각한다. 그는 자기 자신에 대한 유용성을 기준으로 모든 사람과 모든 사물을 판단한다. 그는 기본적으로 사랑할 줄 모른다. 이것은 다른 사람에 대한 관심과 자기 자신에 대한 관심은 불가피한 이자택일임을 증명하지 않는가?


다른 사람의 관심이나 성장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는 마음, 그것이 바로 이기심입니다. 타인은 자신의 욕구를 채우기 위한 수단일 뿐이지요. 그렇다 하더라도 자기를 사랑하다는 측면에서 볼 때, 이기심과 자기애는 동일한 것이 아닐까요? 프롬은 정반대라고 말합니다.


이기심과 자기애는 동일한 것이기는커녕, 사실상 정반대되는 것이다. 이기적인 사랑은 자기 자신을 엄청나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거의 사랑하지 않는다. 사실상 그는 자기 자신을 미워한다. 자기 자신에 대한 애착과 배려의 결여 - 이것은 그의 생산성의 결여에 대한 한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 는 그를 공허하게 만들고 좌절시킨다. 그는 반드시 불행하며 생활로부터 만족을 강탈하려고 초초해 하지만 스스로 이 만족의 달성을 가로막고 있다. 그는 지나치게 자기 자신을 돌보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는 진정한 자아를 돌보는 데 실패한 것을 은폐하고 보상을 얻으려고 노력하고 있을 뿐이며, 이러한 노력은 실패로 끝난다. 이기적인 사람은 마치 그의 사랑을 다른 사람들로부터 철수시켜 자기 자신에게 돌리는 것과 같다고 해서 프로이트는 이기적인 사람이 자아도취적이라고 주장한다. 이기적인 사람은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못한다는 것도 사실이지만, 또한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도 못한다.

비유컨대 이기적인 사람이 ‘밑 빠진 독’과 같다면, 자기애적 사람은 ‘마르지 않는 샘’과 같습니다. 아무리 남의 사랑을 받아도 채워지지 않은 근원적인 결핍감이 바로 이기심입니다. 그에 비해 자기애는 써도 써도 다 쓸 수 없이 솟아나는 샘물과 같은 마음이지요. 프롬은 이 둘을 비교하면서 ‘생산성’을 이야기합니다. 이기심은 ‘생산성의 결여’에서 비롯되고, 자기애는 ‘생산성의 활동’에서 생겨나는 것입니다.


사랑을 위한 사회적 변화


사랑, 참 힘든 일이네요. 먹고살기도 힘든데 사랑타령이나 하고 있다고 핀잔을 주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인간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활동 중에 하나인 사랑이 현대처럼 왜곡된 적도 드물다고 할 것입니다. 드라마에서 막장드라마식으로 연출되는 사랑은, 성공을 위해서는 헌신짝처럼 버려야 하는 덕목이 되고 말았지만, 사랑이야말로 인생의 궁극적 목표가 아닐까요?

문제는 이러한 사랑이 현대에 와서 더욱더 어려워졌다는 거지요. 젊은이들의 신세 한탄을 들어보면, 사랑을 하고 싶어도 사랑한 시간도 사랑한 돈도 없다고 하네요.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을 하고 싶어도 집 한 칸 마련하는 것이 하늘에 별따기처럼 어렵고, 직장을 구하기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힘들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제 사랑은 개인이 해결해야 할 개별적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같이 풀어가야 할 사회적 문제가 아닐까요?

프롬 역시 이러한 견해에 동의할 것입니다. 자본주의 사회는 사랑마저도 제대로 할 수 없게 만드는 사회인 셈이지요. 그러기 위해서는 사랑을 쟁취(!)하기 위해서라도 급진적 사회변화의 필요성을 인정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사랑이 개인주의적인 주변현상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인간 실존에 가장 필요한 사회적 현상으로 자리매김되어야 할 듯합니다.


우리 사회는 관리자의 관료 조직에 의해, 직업 정치가에 의해 운영되고 있다. 사람들은 집단적 암시에 의해 동기를 부여받고 그들의 목표는 더 많이 생산하고 더 많이 소비하는 것이고 이 자체가 목적이 되고 있다. 모든 활동은 경제적 목적에 종속하고 수단은 목적이 되었다. 인간은 잘 먹고 잘 입고 있지만 각별히 인간적인 자신의 자질이나 기능에 대해서는 조금도 궁극적 관심을 갖지 못한 자동인형이다. 인간이 사랑할 줄 알게 되려면 인간은 그의 최고의 위치에 놓여야 한다. 인간이 경제적 기구에 이바지하지 않고 경제적 기구가 인간에게 이바지해야 한다.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다”라고 선포했던 예수의 급진적 발언을 떠오르게 하는 대목입니다. 인간을 최고의 위치로까지 고양시키지 못하는 그 어떤 제도나 법률, 관습이나 기구 따위는 비판받아 마땅하고, 인간을 위한 자리로 다시 내려와야 한다고 선언하고 있지요.


그런 점에서 볼 때, 우리는 사랑을 위해서 밀실을 마련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광장을 가꾸어야겠습니다. “인간은 기껏해야 이익을 나누어 갖는데 그치지 말고 경험을 나누어 갖고 일을 나누어 가질 수 있어야 한다. 인간의 사회적이고 사랑할 줄 아는 본성이 그의 사회적 존재로부터 분리되지 않고 사회적 존재와 일체를 이루는 방식으로 사회가 조직되어야 한다.”는 프롬의 말에 따라, 사랑의 깃발을 높이 들고 거리로 나서야겠습니다. 그때, “우리에게는 사랑할 권리가 있다”는 주장이 한갓 개인적인 구호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회변화의 근원적인 슬로건으로 채택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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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읽어주신 독자분에게 감사드립니다. 11회에 걸친 연재를 모두 마쳤습니다. 마지막으로 수줍게 구독신청과 좋아요를 눌러주시면 더욱 용기를 내서 글을 쓸 수 있겠네요. 안 하셔도 힘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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