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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경윤 Jul 21. 2020

2020 독서노트 76 : 강신주의 불교 사랑법

강신주,《한 공기의 사랑, 아낌의 인문학》(EBS BOOKS, 2020)

한 공기의 사랑이다. 그의 고통을 완화시켜주는 ‘한 공기’의 사랑을 할 수 있느냐가 문제다. 한 공기를 넘어서는 모든 사랑은 “정말 사랑했다!”라는 나의 정신 승리는 가능하게 하지만,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그에게 온갖 고통을 가하는 끔찍한 일이다. 심지어 나를 사랑하면 세 공기든 네 공기든 한 가마든 먹어야 한다고 그를 압박한다. 세 공기, 네 공기의 밥을 지은 자신의 수고를 내세우면서 말이다. “당신을 위한 나의 수고를 헛되게 하지 말아줘. 그러면 나는 정말 슬플 거야.” 어느새 그의 배고픔과 포만감보다 나의 수고가 핵심이 되고 만다. 한 공기를 넘어서는 사랑은 이제 사랑의 괘도를 이탈해 공회전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더 이상 애지중지(愛之重之)하지 않게 되니까. 애지중지하는 마음은 그를 아끼고 소중히 여기는 것, 한 마디로 그를 내 뜻대로 부리지 않겠다는 마음이다.(11쪽)     


2014년 강신주는 《매달린 절벽에서 손을 뗄 수 있는가?》(동녘)라는 제목으로 선불교의 명저 《무문관》을 풀어쓴 적이 있다. 그로부터 6년이 지나, 그보다 친절하고 쉽고 자상한 방식으로  《한 공기의 사랑, 아낌의 인문학》(EBS BOOKS, 2020)이라는 책을 출간하였다. 이 책은 EBS TV 강연 프로그램으로 기획된 동 제목의 16회 강연과 동시에 기획 출간된 것이다. “이 책은 고(苦), 무상(無常), 무아(無我), 정(靜), 인연(因緣), 주인(主人), 애(愛), 생(生)을 키워드로 하여 ‘한 공기의 사랑과 아낌의 정신’을 이야기한다. 김선우 시인의 시 8편으로 각 주제를 열어, 싯다르타와 나가르주나, 임제, 백장 등 불교 사유와 함께 동서양 과거와 현재의 중요한 철학적 사유를 종횡으로 아우르며 주제의 핵심에 다가간다.”


불교의 화두가 되는 용어 8개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이 책을 보면서 강신주가 나이가 들어가는구나 느꼈다. 날카로움은 덜어가고 따뜻함은 더해졌다. 현대인에게 전하는 불교적 사랑법이라 할만한 이 책은 강신주 책이 가지고 있는 탁월한 구성력과 집필력이 더해져서 손에 쥐면 끝까지 읽게 만든다. 알라딘 판매지수를 살짝 보니 많이 팔리지는 않은 것 같다. (인문학의 퇴락 현상인가? 강신주의 인기가 줄어든 것인가?)


제목에서 드러나다시피 이 책은 ‘아낌’이 전체 주제이다. 사랑 애(愛)를 강신주는 ‘아낌’이라고 풀이한다. 사랑은 함부로 사용하지 않고 아끼는 것이다. 사랑을 남용하지 않고, 소중히 여기면 적정한 선에게 머무는 것, 그것이 아낌이다. 그것의 구체적인 형상화가 ‘한 공기’이다. 넘치지 않는 사랑, 한 공기면 되는 것을 사랑한다고 한 가마를 먹이지 않는 사랑. 상대방의 고통을 여실히 느끼면서 말을 삼가는 사랑, 영원하지도 순간적이지도 않은 그 사이의 시간 속에 살면서 늘 새롭게 만나는 사랑을 강신주는 이야기한다.


나는 강신주의 맥락과는 다르게 이 ‘아낌’이라는 용어를 명상한 적이 있는데, 나의 사유 속의 아낌은 소비사회의 백신과 같은 것이고, 노자 철학의 핵심인 검(儉)을 현대화한 것이고, 코로나 바이러스 이후 인류의 핵심적인 삶의 태도로써 ‘공존’과 ‘보살핌’과 같은 것이었다. 칼 슈마허의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불교 경제학과 윤리학과 맥을 같이 하는 용어가 바로 ‘아낌’이다. 적정 경제, 적정 소비, 적정 생활……. 그러니까 나에게 ‘아낌’이란 사회윤리적 태도와 관련된 것이라면, 강신주의 아낌은 인간의 사랑과 더 깊은 관련이 있는 용어이다. 물론 거시적 차원에서는 같은 맥락이겠지만, 강신주의 글쓰기가 일상적인 삶에 더 가깝게 밀착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추신> 그렇다고 강신주의 철학이 사회철학을 외면하고 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는 이 책 말고  ‘강신주의 역사철학, 정치철학 강의 시리즈’ 중 1권으로 《철학 vs 실천》 (오월의봄, 2020)을 거의 동시에 출간했는데 분량이 848쪽이다. 이 시리즈는 5권으로 기획되어 있는데, 두 달에 한 권씩 나온다고 하니 모두 출간될 경우 강신주 저서 중 가장 분량이 많은 – 대략 4,000여 쪽 - 책이 될 것이다. 1권 가격이 38,000원이라 부담은 되지만 읽어볼 작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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