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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경윤 Oct 13. 2020

2020 독서노트 93 : 이진경의 선악의 저편 해설

이진경, 《사랑할 만한 삶이란 어떤 삶인가》(엑스 북스, 2020)

요컨대 ‘삶을 사랑하라’라는 명령은 ‘사랑할 만한 삶을 살아라!’는 뜻이고, ‘어떤 것이 사랑할 만한 삶인가?’, ‘너는 지금 사랑할 만한 삶을 살고 있는가?’, ‘지금 네가 하려는 것은 사랑할 만한 삶을 향한 것인가?’를 항상 물으라는 명령문입니다. 이는 니체가 철학을 삶으로 되돌려 놓기 위해 자기 자신에게 던졌던 질문이기도 합니다. 그가 쓴 많은 글들은 바로 이런 질문을 스스로 던지며 찾은 것입니다. 사랑할 만한 삶을 사유하는 데 필요한 지적 자원들을 니체는 이 텍스트들을 통해 제공하고 있는 것입니다.(27~28)     


기쁨과 슬픔은 한꺼번에 몰려온다더니, 지금 시기가 그러하다. 한편으로는 코로나로 인해 경제적으로 위축되어 슬프기도 하다가, 그나마 쓸 책을 계약하고 저술에 몰두하는 것이 기쁘기도 했다. 물론 글쓰기란 중노동에 해당하는 것이니, 단지 기쁜 것만은 아니지만, 어쨌든 조금이라도 계약금이 손에 들어왔으니 가족에게 면이 섰다는 안도감에, 밤을 낮 삼아 글을 쓰고 있었다.

그런데 우연히 책정보를 검색하다가 이진경이 니체의 《선악의 저편》과 《도덕의 계보》를 강의하여 풀어쓴 《사랑할 만한 삶이란 어떤 삶인가》와 《우리는 왜 끊임없이 곁눈질을 하는가》(엑스 북스, 2020)를 동시에 출간했다는 소식을 뒤늦게 접하게 되었다. 이진경은 고병권, 고미숙과 더불어 나의 책 구매 리스트의 0순위에 올라와있는 저자다. 지금까지 저들의 저작은 나를 실망시킨 적이 없을뿐더러, 지적 수준을 고양시키는 데 일조했기 때문이다.

주문한 책방에 들러 두 권을 들고 작업실로 돌아오는 길이 상쾌했다. 하지만 이 책들을 읽으려니 걱정이 앞섰다. 써야 할 글도 태산인데, 이 책 또한 태산에 값하는 책이다. 니체×이진경을 읽는 것이 수월한 것은 아니니. 잠시 고민하다가, ‘일단 한 권만!’하며 펼친 책이 니체의 《선악의 저편》을 해설한 《사랑할 만한 삶이란 어떤 삶인가》이다. 당연히 읽는 데 하루를 투자해야 했다. 기분은? 상쾌하고 가뿐하다. 책을 쓰느라 지친 영혼에 자양분을 얻은 것 같다.


이진경은 니체의 《선악의 저편》을 해설하며 핵심 질문으로 ‘사랑할 만한 삶은 어떤 삶인가?’를 묻는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것이 이 책을 읽는 것의 관건이 되겠다. 한편 이진경은 ‘니체의 눈으로 읽는 니체’라는 부제를 달기도 했다. 이 부제는 다양한 생각을 일으키는데, 내가 독해한 바로는 ‘니체의 투시법’으로 니체를 읽되, 니체의 ‘시대적 한계와 지적인 편향’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투시법’에 입각하여 재비판하는 형식을 취하는 것이다. ‘니체에 의한 니체 비판’ 쯤이 되겠다. (이러한 독법이 가장 명료하게 드러나는 곳은 책의 말미이다.)

이진경의 니체 독법은 삶과 유리된 객관적 앎이나 지적 유희가 아니라, 삶을 살아가는 일상의 무기이자 도구로 니체를 읽는 것이다. 니체를 읽는다는 것은 니체처럼 생각하고 살아보라는 삶의 초대이다. 예수를 알거나 믿는 것과 예수처럼 생각하고 살아가는 것이 다른 이야기인 것처럼, 어떤 저술을 읽는 것과 그 저술의 관점으로 생각하고 살아가는 것은 다르다. 그리고 현대의 책 읽기는 대부분은 삶과 유리된 지적 교양의 차원에서 소비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런 점에서 이진경의 접근은 지적 독해가 아니라 실천적 독해라 할 만하다. (이런 이진경의 제안에 동의하느냐와는 별개로, 이런 제안은 삶에 무감해진 우리 일상에 자극이 된다.) 이진경은 이 책에서 니체의 저술뿐만 아니라 서양의 철학에 대해서도 풍부한 읽을거리를 제공하는데 이를 설명하는 데에 지면을 할애하지는 않을 것이다.(엄밀히 말해 이 글은 독서 노트니까.)


그냥 질문에 대한 답으로 직진하자면, 사랑할 만한 삶은 ‘주인’이자 ‘강자’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며, 남의 주인이 아니라 ‘주권적 개인’으로 자신의 대해 주권을 행사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자신에게 명령하고, 자신을 지배하고, 자신의 명령을 책임지고 실행할 수 있는 능력이나 역량을 갖는 것, 이를 니체는 ‘강자’라고 말했다. 그러기에 ‘강자’는 남에게도, 나에게도 약속을 할 수 있는 자이다.(91쪽)

흔히들 니체의 철학을 나치즘이나 파시즘과 연결시키곤 하는데, 이진경은 이러한 니체 독법은 니체를 정확히 읽지 않았기 때문에 생긴 오해라고 말한다. 오히려 니체는 자신이 주인이 되지 못하고 구성원에 일원이 되는 것에 만족하는 패거리주의(집단주의)나 공동체주의, 민족주의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비판한다.


책을 읽는 ‘강도’에 대해서도 이야기해야겠다. 많은 책들이 처음에는 읽을만하다가 뒤로 갈수록 뒷심이 부족한 용두사미(龍頭蛇尾)적 강도를 갖는데, 이 책은 뒤로 갈수록 강도가 강해지는 장점이 있다. 이는 앞에서 용어를 정확히 정리하고, 뒤로 갈수록 정교하게 풀어쓰는 이진경의 내공에 해당할 텐데, 바로 이런 점이 내가 이진경의 책을 빠짐없이 구입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화룡점정(畵龍點睛)의 글쓰기라고나 할까? 삶의 주인공이 되고 싶은 사람, 사랑할만한 삶을 살고 싶은 사람에게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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