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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경윤 Jun 13. 2021

반야심경 명상 3 : 깨달음과 수행

사리자여! 색이 공과 다르지 않고 공이 색과 다르지 않으며, 

舍利子 色不異空 空不異色     


색이 곧 공이요 공이 곧 색이니, 수 상 행 식도 그러하니라.

色卽是空 空卽是色 受想行識 亦復如是     


2007년 이안 감독이 연출한 <색,계(lust, caution)>라는 영화가 있었다. 1979년 장아이링이 발표한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는 이 영화는, 1940년을 전후로 하여 실제로 일어난 사건들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상하이를 배경으로 전개되는 이 영화는 친일파의 핵심인 정보부 대장 ‘이’(양조위 분)와 그에게 접근하여 암살하려는 항일단체의 일원인 막부인(탕웨이 분) 사이에 벌어지는 일들을 그리고 있다.

욕망(色,lust)이라는 위험한 도구를 사용하라는 항일단체의 잔인한 계율(戒,caution)은 성공할까? 사랑은 하되, 진짜 사랑은 하지 말라는 이 모순적인 명령을 연극부원 막부인은 현실 속에서도 잘 따를까?  (궁금하면 영화를 보시길.)   

우리의 말 속에서 “색을 밝힌다”는 말이 있다. 주로 성욕과 관련되어 사용되는 이 말은 색(色)이 가지는 매혹과 위험을 동시에 보여주는 말이다. 색욕(色欲), 식욕(食欲), 수면욕(睡眠欲)은 인간이라면 피해갈 수 없는 근원적인 욕구에 해당한다. 여기에서 자유로운 자 얼마나 될까?     


불교 경전에 나오는 색(色)은 이러한 욕망보다 더 의미와 용법이 광범위하다. 불교도라면 색으로 시작되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연속단어들은 수상행식(受想行識)이라는 오온(五蘊, 다섯 더미)이다. 그때의 색(色)은 물질세계에 대한 총칭이다. 한편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이라는 육식(六識)과 관련된 단어도 떠오를 것이다. 인간 주체의 감각과 인식기관인 안이비설신(眼耳鼻舌身意)이 대상과 만나 형성된 의식이 바로 육식(六識)이다. (이 육식과 관련되서는 뒤에 다룰 것이다.)     

정리해보자면, 색(色)은

1) 일반적으로는 성욕과 관련되어 있으며

2) 불교적으로는 형상을 가지고 있는 전체 물질세계

3) 인간의 신체기관인 눈을 이용하여 인식하는 시각적 이미지

등의 뜻을 가지고 있다. 

인용문의 색(色)은 2)에 해당한다.     


본문의 '사리자'는 부처의 수제자 사리붓타이다. 부처님 살아생전에 부처의 말씀을 들은 성문(聲聞)제자다. 그런데 그가 관자제보살에게 지혜의 말씀을 듣는다. 현실적으로는 말도 안되는 상황이다. 하지만 <반야심경>의 설정은 그렇다. 보살이야말로 대승불교의 화신이며, 모든 신도들의 표상이다. 성직자와 신도의 경계는 무너진다. 오직 깨달음만이 있을 뿐이다. 

'불이(不異)'는 다르지 않다는 뜻이다. 불교는 현상계[色]과 깨달음의 세계[空]을 다르지 않다고 본다. '즉시(卽是)'는 같다는 뜻이다. 같은 뜻의 다른 표현을 통해 반복 강조한다. 현상계는 진리의 세계와 같고, 진리의 세계는 현상계와 같다. '역부역시(亦復如是)'는 이하동문이란 뜻이다. 그러니까 오온(五蘊)을 다섯 문장으로 반복해 쓰지 않고, 달랑 두 문장으로 축약한 것이다. 마치 상장을 받을 때 처음 학생에게만 전문을 읽어주고, 나머지 학생에게는 ‘이하동문’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그런데 이 짧은 문장은 묘한 긴장감을 불러일으킨다.

논리적으로만 치자면 색불이공(色不異空), 색즉시공(色卽是空)이라고만 써도 문제 없는데, 다시 말해 우리가 경험하고 안다고 생각하는 모든 세계가 공(空)하다고만 말해도 되는데, 왜 공불이색(空不異色), 공즉시색(空卽是色)이라는 문장을 추가한 것일까?         

            


색불이공(色不異空)이나 색즉시공(色卽是空)이 깨달음의 단계라면, 공불이색(空不異色)이나 공즉시색(空卽是色)은 깨달음의 눈으로 다시 세상을 보라는 수행의 단계가 아니었을까? 

살다보면 몰라서 못하는 경우도 있지만, 알아도 안하는, 또는 못하는 경우도 많다. 깨달음이 인식의 변화라면, 수행은 삶의 변화이다. 깨달음과 수행은 단순한 선후단계가 아니다. 알면 그렇게 살아지기도 하지만, 살다보면 알아지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불가에서는 깨달음[悟]과 수행[修]을 놓고 돈오돈수(頓悟頓修)니 돈오점수(頓悟漸修)니 논쟁했던 것이리라. 깨달음은 순식간에 오지만, 수행은 순식간에, 혹은 점차적으로 이루어진다는 이 논쟁은 참으로 역사가 깊다.

나는 차라리 점오점수(漸悟漸修)를 말하리라. 깨달음의 길도 멀고, 수행하는 삶의 길은 더욱 멀어라. 그러나 어쩌라. 제 깜냥만큼 흔들리며 걸어갈밖에.   심우도에 나오는 어린 동자처럼. 나의 소를 찾아서 오늘도 걸어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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