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어(화자)는 부처가 아니라 관자재보살이다. 나중에 알게 되겠지만 대상(청자)은 사리자다. 사리자는 바라문 계급출신으로 목건련과 함께 부처님께 귀의한 성문(聲聞, 부처 살아생전 그의 육성을 직접들은 제자) 중 성문이다. 지혜제일인 제자로 부처의 10대 제자 중 한 사람이다. 그러니까 보살이 성문(아라한)을가르치고 있는 셈이다.
사리자(사리붓다, 사리불)은 부처님이 가장 사랑한 제자이자, 부처 사후 살아있었다면 부처님의 승단을 이끌 수제자이다. <숫타니파타>에서는 사리불이 부처의 계승자로 언급되어 있다.
관자재보살(관세음보살)은 대승불교와 더불어 태어난 캐릭터이다. 기원후 1세기 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관자재보살이 처음 만들어진 것은 쿠샨왕조시대(1세기 중엽에서 3세기 중엽까지) 간다라지방에서였다. 관자재보살은 철저히 대승불교운동의 ‘하화중생(下化衆生)’의 정신을 이어받은 것으로 자비와 구제의 심볼이다.
관자재보살의 원래 이름은 ‘아발로키테스바라Avalokiteśvara’로 “보는 것, 관찰하는 것avalokita이 자유자재롭다iśvara”는 것이다. 이는 현장의 번역이고, 구마라집은 ‘관세음보살’이라 번역했다. 우리에게는 구마라집의 번역이 익숙하다. 하지만 <반야심경>은 현장의 번역을 따르기에 관자재보살이라 쓴다.
석굴암에 있는 11면관음보살. 얼굴이 11개라서 세상 모든 곳을 대자대비한 눈으로 살필 수 있다.
대부분의 불교경전은 '나는 이렇게 부처님께 들었다'로 시작한다. 진리를 전하는 화자가 싯타르타 부처(남자)다. 그런데 <반야심경>의 화자는 여성(이라 고집할 수는 없지만 대부분 보살은 여성으로 그려진다.)이다. 이 자체가 혁명적이다. 석굴암에 중앙을 차지하고 있는 아미타불 뒤쪽에 십일면관음보살이 있다. 사진을 보라. 영락없이 여성이다. (예전 국어교과서에 실린 현진건의 <불국사 기행>에는 십일면관음보살의 여성미에 대한 낯뜨거운 예찬이 길게 나열되고 있다.)
요즘 절에 가면 여성신도를 보살이라 한다. 남성신도는 거사다. 문학적 상상력을 발휘하여 현대적 그림으로 바꾸면 깊은 신앙심이 있는 여성신도가 주지스님을 가르치는 꼴이다. 상상만해도 통괘한 그림이다.
그러니 앞으로 남성 부처님이 아니라 여성 보살님이 진리를 설파하고 있다고 상상하며 읽기 바란다. 그것만으로도 신선하고 놀라울 것이다. (물론 반야의 지혜는 성을 초월하니 여성만 그 지혜를 얻는 것은 아니다.)
‘행(行)’은 실천한다는 동사이고, ‘심(深)’은 심오하다는 뜻이다. ‘시(時)’는 특정한 시점이라기보다 통시간적인 개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