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가 부족함 없이 쾌락에 넘치는 궁궐생활을 하다가 저잣거리로 나가서 늙고, 병들고, 죽은 자를 목격한 것이다. 왕자 싯타르타는 충격에 사로잡힌다. 무엇 하나 부족한 없는 삶을 살아가는 귀족적 생활과는 전혀 다른 비참한 삶이 궁궐 밖에 있었다. 문제는 그 생노병사(生老病死)의 운명이 궁궐 안이라고 해서 비켜갈 수 있는 것이 아님을 깨달은 것이다. 부유하든 가난하든, 귀족이든 천민이든, 젊든 건강하든 인간이라면 누구나 이 태어나 늙고 병들고 죽는다는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 싯타르다 자신도, 사랑하는 아내와 자식도, 권력의 위치에 있었던 아버지도 예외는 아니었다. 불교적 설화는 이를 싯타르타의 사문유관(四門遊觀)이라 전한다. 싯타르타 왕자가 마지막에 북문 바깥에서 만난 사람이 수도승이었다. 생노병사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이 있다고 형형한 눈빛으로 싯타르타에게 말하자, 싯다르타는 출가를 결심한다. 그의 나이 29세였다.
둘째는 그렇게 모든 것을 버리고 출가하여 생노병사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참된 나(眞我, 아트만)을 찾아 수행하다가 참된 나란 없다는 것(無我, 아나트만, anatman)이라는 통찰에 이르른 것이다. 나란, 나의 의식이란 결국 수없이 많은 인연(因緣)에 의해서 생겨났다가 사라지는 것이라는 것. 영원하다는 신조차도 이러한 연기(緣起)로부터 한치도 벗어날 수 없다는 것. 고통이란 이러한 연기적 모습을 깨닫지 못하여 집착하는 자신의 무지로부터 비롯된다는 것. 그러한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 참된 나란 없음을, 이 세상의 모든 현상이 영원하지 않음을 깨달은 것이다. 한자성어를 섞어 표현해보자면, 일체개고(一切皆苦)는 제법무아(諸法無我)와 제행무상(諸行無常)임을 알 때 사라진다는 것이다.
부처의 이 무아(無我)의 깨달음은 대승불교로 계승되면서 공(空)으로 압축된다. ‘공(空)’은 비어있다는 뜻이 아니다. 나도, 이 세상도, 그리고 이 세상을 겪으며 생기는 나의 생각도 영원하지 않다는 것이다. 영원하지 않을 것을 영원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집착이고, 이 집착에 머무르는 것이 고통이다. 썸씽 스페셜(something special)한 것은 없다. 특별하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everything)은 결국 아무것도 아닌 것(nothing)이 된다. 그러한 눈으로 바르게 세상을 볼 때 진정한 자유와 해방을 맛볼 수 있다. 이러한 공사상은 새로운 것을 세우려는 노력이 아니라, 망상으로 세워진 헛된 것들을 무너뜨리는 것이다. 고통의 탑도 그렇게 무너진다.
‘조견(照見)’은 비추어 밝히 안다는 뜻이다. ‘오온(五蘊)’은 색(色), 수(受), 상(想), 행(行), 식(識) 이 다섯을 말한다. 이 중에서 색(色, 루빠rūpa)은 물질적인 요소의 총칭이다. 지수화풍(地水火風)의 4요소로 구성된 우리의 육체도 루빠이다. 이것은 물질적인 것이고, 나머지 4온은 정신적인 것이다. 수온(受蘊, vedanā)은 감각기관의 감각작용(perception)이고, 상온(想蘊, saṃjnā)은 생각하는 표상작용(representation)이고, 행온(行蘊, saṃskāra)은 의지로 움직이는 의지작용(volition)이고, 식온(識蘊vijnāna)은 판단력을 갖춘 의식작용(consciousness)을 말한다. 색→수→상→행→식은 물질의 차원에서 정신으로 차원으로 진화되는 조합과정이다. 이 세상을 구성하는 모든 것도, 그러한 과정에서 생기는 정신적 현상도 모두 공(空)하다. ‘도(度)’는 건너다, 구제하다는 뜻이다. 액(厄)은 재앙, 불행, 멍에, 사나운 운세 등을 뜻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도, 우리의 생각도 인연에 따라 모두 일시적으로 형성되었다가 사라지게 된다. 고통과 재앙도 마찬가지다. 이 또한 지나간다. 놀라지 마라, 두려워 마라. 무소처럼 당당하게 갈 길을 가라. 사자처럼 용감하라. 공(空)을 깨달아 자유로워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