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와 90년대는 변혁의 시기였다. 군사독재에 맞서 학생운동, 노동운동, 종교운동, 정치운동이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을 조직하고 민주주의를 열망하는 시대였다. 대학의 사회과학서점을 중심으로 다양한 혁명이론서적들이 비공개, 반공개의 방식으로 유통되었다. 각종 문화패들이 결성되었다. 그중에서도 노래패들의 활동이 눈부셨다. 투쟁가요들이 대거로 창작되어 현장에 공급되었다. 대부분 시위현장에서 부를 수 있는 군사풍의 노래였다. 주먹을 위로 뻗으며 한목소리로 외치는 노랫소리는 광장을 울리고 하늘로 퍼져나갔다.
심장을 뛰게 만드는 노래들이 대부분이었는데, 개중 가슴을 적시는 노래가 있어 무뎌진 정서를 촉촉하게 적셨던 기억이 난다. 예를 들면 천지인이 부른 <청계천 8가>와 같은 노래는 잔잔하게 당대 현실을 묘사하였다.
하지만 내가 가장 좋아한 노래는 민중운동연합의 이름으로 펴저나간 <부서지지 않으리>라는 노래다. 가사를 음미하면 뭔가 철학적이랄까 종교적이랄까, 다른 민중가요에는 없는 세계관이 분명히 그 노래 가사 속에는 있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 노래는 김준태의 시에 이미영이 곡을 붙여 만든 것이었다. 노래 가사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사라진다는 것 부서진다는 것
구멍이 뚫리거나 쭈그러진다는 것
그것은 단지 우리에게서 다른 모양으로 보일 뿐
그것은 깊은 바닷속 물고기처럼
지느러미 하나라도 잃지 않고
이 세상 구석구석 살아가며 끝없이
파란 불꽃을 퉁긴다
사라진다는 것 부서진다는 것
그것은 단지 우리에게서 다른 모양으로 보일 뿐
나에게 적지 않은 위로를 준 이 노래는 <반야심경>의 위 구절과 퍽이나 잘 어울린다. 살짝 변형하여 다시 인용하면 "이 세상 모든 생각은 텅 비어 생겨나지도 사라지지도 않는다. 더립지도 깨끗하지도 않다. 늘어나지도 줄어들지도 않는다."
인간이 경험하고 인식하는 세상은 태어나고 죽는다. 어떤 것은 더럽고 어떤 것은 깨끗하다. 재산이나 소유물은 늘어나고 줄어든다. 그러나 우주적 관점에서 보자면 그 어느 것 하나도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은 단지 우리에게서 다른 모양으로 보일 뿐"이다. 모든 존재는 "이 세상 구석구석 살아가면 끝없이 파란 불꽃을 퉁기"는 연기의 변형태일 뿐이다. 사는 것도 죽는 것도, 깨끗한 것도 더러운 것도, 늘어나는 것도 줄어드는 것도, 이 세상 모든 것이 모두 공하다. 이 전언이 그대에게 위로가 되는가? 공포가 되는가?
적어도 나에게는 허무나 공포가 아니라, 힘든 세상을 다르게 볼 수 있는 위로가 되었다. 여러분도 그리하길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