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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경윤 Jun 23. 2021

반야심경 명상 5 : 없음의 의미

그러므로 공 가운데는 색이 없고 수 상 행 식도 없으며,

是故 空中無色 無受想行識  

   

안 이 비 설 신 의도 없고,

無眼耳鼻舌身意   

  

색 성 향 미 촉 법도 없으며, 

無色聲香味觸法   

  

눈의 경계도 의식의 경계까지도 없고,

無眼界 乃至 無意識界    

 

세계철학사를 큰 틀에서 양분하면 ‘존재’의 철학과 ‘생성’의 철학으로 대별할 수 있다. ‘존재의 철학’은 영원한 있음[有]을 인정하고 없음을 부정한다. 이 입장의 슬로건은 “있는 건 있고 없는 건 없는 것이다.”이다. 고대 엘레아학파 철학자 파르메니데스(BC 535~?)에서 출발하는 이 철학적 태도는 플라톤의 ‘이데아’,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 중세철학의 ‘신’에 이어 근대철학의 ‘이성(정신)’에 이르기까지 서양철학의 주류적 입장이었다. 이 철학은 영원한, 변하지 않는, 독립적인, 궁극의 실체(실재)를 전제하고 철학적 사유를 전개하였다. 인도의 주류철학인 베다철학과 <우파니샤드>철학도 이와 다르지 않다. 영원한 정신인 브라흐만(Brahman)과 불변의 주체인 아트만(atman)의 일치를 소망한다.  범아일여(梵我一如)가 바로 그것이다.

이와는 대별되는 것이 ‘생성의 철학’이다. 생성의 철학은 변화와 생성을 긍정하고, 세상을 그러한 변화와 생성의 파노라마로 해석한다. 이러한 철학적 입장은 없음[無]을 긍정한다. 생성은 타자(他者)와 없음[無]의 영역을 확보해야지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지중해의 고대철학에서 이를 대변하는 철학자는 만물유전(萬物流轉)을 주장한 헤라클레이토스였다. 그러나 이러한 생성의 철학이 서양철학계에서 주류를 차지한 적은 없었다. 서양의 근대철학에 와서야 베르그송이나 니체에게 새롭게 조명되었을 뿐이다. (아, 들뢰즈가 있구나.)

불교는 인도철학의 관점에서 보면 비주류이고 소수자의 입장이다. 인도의 전통철학은 불변의 자아인 ‘아트만(atmam)’를 강조한다. 그러나 불교는 연기론적인 무아(無我, anatman)‘를 강조하며 이를 부정한다. 무상(無常)과 무아(無我)는 불교를 특징짓는 대표적인 용어이다. 원인과 결과, 존재형성의 일시적 관계를 주장하는 불교의 연기론(緣起論)는 모든 영원한 존재와 관념을 부정한다. 존재를 구성하는 관계가 영원하지 않다면 존재 자체의 영원성은 확보될 수 없다. 하물며 존재가 구성한 인식이야 말해 무엇하랴.     


위의 인용된 문장을 살펴보면 없을 무(無) 자가 6개가 보일 것이다. 구문으로 정확히 계산하면 4개의 없음을 확인할 수 있다. 오온(五蘊)이 없고, 육근(六根)이 없으며, 육식(六識)이 없으며, 육경(六境)이 없다. 오온은 이미 설명한 바 있으니 넘어가고, 육근이니 육식이니 육경은 불교의 18계(界)를 일컫는다. 육근(六根, 주체)에 해당하는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가 있고, 육식(六識, 의식의 장들)에 해당하는 안식(眼識), 이식(耳識), 비식(鼻識), 설식(舌識), 신식(身識), 의식(意識)이 있으며, 육경(六境, 대상)에 해당하는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이 있다.


<반야심경>은 이 모든 의식의 구성장치가 영원하지 않다는 측면에서 없음[無]를 선포한다. 그러므로 공(空)의 관점에서 보면 모든 주체와 객체, 그 사이에서 형성되는 모든 의식은 없다. 18계가 모두 사라진다. 주체의 6계, 객체의 6계, 인식활동의 장 6계가 공하다.     

불교는 변화와 생성만이 존재를 설명할 수 있다는 공(空)의 관점을 택한다. 따라서 인식의 주체도, 인식의 대상도, 그 관계에서 형성되는 인식도 일시적이고 가합(假合)적일 뿐 영원성을 확보할 수 없다. 영원성이 없다는 것은, 절대적 존재인 일자(一者)의 부정이다. 이러한 입장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인류의 주류가 따라왔던 길을 미궁에 빠트린다. 신 없이 구원이 가능할까? 절대적 기준 없이 삶이 가능할까? 믿음은 고사하고 신념이나 이념 등의 형성은 무엇을 근거로 해야할까?

불교의 개념은 구축의 개념이 아니라 해체의 개념이다. 세상이 설명하기 위해 자신이 구성해놓은 핵심개념들도 보존하지 않고 부정한다. 쌓지 않고 무너뜨린다. 우리는 그 없음의, 그 폐허의 현장에서 다시 출발해야한다. 세상 모든 것은 공(空)하다. 그대의 인식도구는 쓸모 없다[無]. 이제 그대는 무엇을 할 것인가? 여기서 로도스다. 뛰어 넘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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