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명도 무명이 다함까지도 없으며,
無無明 亦無無明盡
늙고 죽음도 늙고 죽음이 다함까지도 없고,
乃至無老死 亦無老死盡
고 집 멸 도도 없으며, 지혜도 얻음도 없느니라. 아무런 소득이 없기 때문이다.
無苦集滅道 無智亦無得 以無所得故
장모님께 가끔 방문을 하면 가족의 손을 붙잡고 간절히 기도하신다. 복에 복을 주시옵고, 건강을 주시옵고, 하는 일마다 다 잘 되게 해 주시옵고……. 평소에 생각하고 계셨던 소망리스트를 일일이 열거하시고 나서, 말로 빌지 않은 것조차 주님께서 아시오니 모두모두 주시옵소서. 아멘. 수백번이고 수천번이고 달라는 이 기도를 주님께서 들어주시지 않으면 어쩌시려나 걱정하지 않고 오직 믿음으로 빌고 또 비신다.
이런 세속적인 빎이 아니라 할지라도 종교의 가장 큰 기능은 인간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달라는 것이다. 보통 기복신앙이라 말하지만, 이 기복신앙이 아니었던들 종교가 민중의 삶의 뿌리내릴 수 없었을 것이다. 기복(祈福), 즉 복을 빎이야말로 종교의 핵심이다. 뭔가 얻는 것이 있어야 시간도 내고 돈도 내고 할 것 아닌가.
그 빎의 내용이 지혜라 해도 달라질 것은 없다. 더 고급스러워 보일지언정 어차피 비는 행위는 마찬가지다. 그런데 <반야심경>은 그 빎의 행위에 찬물을 끼얹는다. 빌어봐야 소용없다고 말한다. 아무런 소득도 바라지 말라고 경고한다.
위의 본문은 이전의 없음[無]의 계속이다. 이번에는 부처님의 최초의 근본적 깨달음이라 할만한 연기법(緣起法)과 사성제(四聖諦)가 부정된다. 조금더 살펴보자.
싯달타 부처가 보리수 밑에서 인간의 늙고 죽음으로 인한 고통이 생기는 일련의 원인을 추적하면서 12개의 연기를 찾아낸다. 늙어 죽음[老死]은 태어남[生]에서 생겼고, 태어남은 있음[有]에서, 있음은 취함[取]에서, 취함은 사랑[愛]에서, 사랑은 얻음[受]에서, 얻음은 접촉[觸]에서, 접촉은 세상과 만나는 여섯 입구[六入]에서, 여섯 입구는 이름과 존재[名色]에서, 이름과 존재는 앎[識]에서, 앎은 행함[行]에서, 행함은 밝지 않음[無明]에서 생겼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러니 노사(老死)라는 고통은 궁극적으로 바로 무명(無明), 즉 어리석음에서 생긴 것이다. 이 순서를 뒤집으면 무명(無明)에서 비롯하여 노사(老死)에 이르기까지의 고통이 형성되는 연속적 원인과 결과를 추적할 수 있다. 이 생성의 인과를 펼치는 것을 유전연기(流轉緣起)라 한다. 그 역순을 밝으면 인과가 소멸되니, 이를 환멸연기(還滅緣起)라 한다. 고통이 생기는 시리즈와 고통을 없애는 시리즈가 바로 연기법이다.
<반야심경>은 이중 처음인 무명(無明)과 맨 마지막인 노사(老死)를 예로 들어 12연기 전체를 부정하고 있다. 연기설 자체도 없다. 최초의 깨달음도 깨달음이 아니다.
그 다음으로 이 인과를 압축적으로 정리한 고집멸도(苦集滅道)의 사성제(四聖諦)가 언급된다. 고통[苦]이라는 결과를 낳는 원인은 집착[集]이라는 깨달음(유전연기의 압축판)과 고통의 사라짐[滅]이라는 결과를 낳는 바른 길[道]이 있다는 깨달음(환멸연기의 압축판)도 부정된다.
그리하여 앞절에 논의했던 존재와 의식의 18계만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12연기와 4성제(聖帝)마저 부정된다. 어리석음[無明]이 없으니, 어리석음의 사라짐[無明盡]도 당연히 없게 된다. 늙어죽음[老死]이 없으니, 늙어죽음이 다함[老死盡]도 당연히 없다. 우리는 없는 것을 없앨 수는 없으니까. 본래 아무 것도 없었으니 깨달음[苦集滅道]도, 앎[智]도 얻음[得]도 없다. 아, 결국 아무런 소득(所得)이 없다.
반야(般若)의 지혜를 얻고 싶은가? 찾아봐야 텅 비어[空] 있다. 우리가 깨달음에 도달하고자 만들었던 온갖 개념들(5온, 6근-6식-6경의 18계, 12연기, 4성제)도 없다. 개념이 없으니 지식이 없다. 지식이 없으니 얻음이 없다. 얻음이 없는 지혜를 지혜라 할 수 있을까? 이 텅빈 지혜를 얻어봐야 아무 소용이 없는데, 사람들은 무엇을 바라 <반야심경>을 읽고 또 읽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