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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경윤 Aug 16. 2022

장자를 달린다 5 : 장애가 없는 자 누구인가

- 5편 <덕충부(德充符)>

만물은 모두 하나다 [萬物皆一也]

무릇 이와 같은 자는 [夫若然者]

귀나 눈이 좋아하는 것을 알지 않고 [且不知耳目之所宜]

마음을 덕의 조화 속에 노닐게 하여 [而遊心乎德之和]

만물을 하나로 보고 [物視其所一] 

그 잃음을 보지 않는다 [而不見其所喪]        

  

나이가 들다보니, 몸이 하나 둘 씩 고장나기 시작합니다. 학창시절에는 눈이 고장나기 시작했고, 젊은 시절에는 장과 간이 고장나기도 했습니다. 중년에는 혈관과 심장이 고장났고, 노년에 가까이 오니 관절과 근육이 고장나고 있습니다. 

새차를 뽑아서 소중히 타도 10년 타기 힘들다는데, 지금 차로 20년 가까이 타고 있으니 참으로 오랜 세월 같이 했습니다. 다큰 자식들은 어서 폐차시키고 새차로 뽑으라고 하지만, 그 자식들 자랄 때 나랑 같이 고생한 차를 함부로 폐차시키기도 어렵습니다. 경제적 능력의 문제도 있지만, 마음이 쉽게 허락하지 않습니다. 차야 폐차시키면 그만이라지만, 몸은 쉽게 폐기시키지 못합니다. 이 한 몸 다 쓸때까지 소중해 챙겨줘야하는 것처럼, 이 낡은 차도 다 쓸때까지 소중하게 하기로 마음먹습니다.      

인생, 몸으로 생각하면 점점 낡아가는 것이로되, 맘으로 생각하면 점점 새로워질 수도 있습니다. 장애야 이르건 늦건 누구나 겪는 일이지만, 그 장애를 겪는 마음은 다스릴 수 있지 않을까요? <덕충부(德充符)>편은 이 장애의 문제를 주로 다루고 있습니다. 몸의 장애와 마음의 장애 중 무엇을 돌볼 것인가? 외부로 들어나는 형(形)이 아니라 내부에 숨겨져 있는 덕(德)을 어찌 채울 것인가? 장자의 물음입니다.


처음에 등장하는 인물은 절름발이 장애인 왕태입니다. 그는 장애인이로되, 그를 따라 공부하는 사람이 엄청나서 장안의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그는 말로 가르치지 않으나, 그를 따르는 자들은 그에게 배워 마음이 풍족해집니다. 공자의 제자인 상계는 이를 이상하게 생각하고, 공자에게 푸념을 합니다. 어찌 장애인이 공자보다 많은 제자를 거느닐 수 있느냐고. 공자는 말합니다. 그는 성인(聖人)이라고. 자신도 그를 스승으로 모시고 싶다고. 상계는 더욱 의아하여 공자에게 연유를 묻습니다. 공자는 말합니다. 그에게 장애는 장애가 아니라고. 심지어 죽음조차도 그에게 영향을 끼치지 못할 것이라고. 그는 마음은 덕의 조화된 경지에서 놀고 있다고, 그는 만물을 하나로 보고 외형의 변화로 슬퍼하지 않는다고. 그의 마음은 잔잔히 가라앉은 물과 같아 뭇사람들이 그 마음으로 자신을 바르게 할 수 있다고. 그래서 그는 사람들을 모으려 하지 않아도 사람들이 저절로 그의 곁에 모이는 것이라고.     

<덕충부>에는 왕태뿐 아니라 온갖 장애인들이 등장합니다. 외발이 신도가, 낙타처럼 등이 굽은 추남 애태타, 절름발이에 곱사등이에 언청이인 인기지리무신과 물동이 만한 혹을 달고 다니는 옹앙대영에 이르기까지. 장자가 자신의 저술에 장애인을 다수 등장시켜 이야기를 전개하는 것을 보면서, 당대에 얼마나 많은 장애인들이 살았는지 절감하게 합니다. 또한 장자가 얼마나 그들 곁에 가까이 있었는지도 짐작하게 합니다. 귀족들은 장애인이 거리끼는 존재였지만, 장자에게 장애인은 소중하고 친한 친구였습니다. 장자는 그들의 외모를 보고 판단하지 않고 그 마음을 보고 그들과 친구가 되었습니다. 겉으로 보이는 외모보다는 겉으로 보이지 않는 마음, 그 마음을 온전히 보전하는 것이 진정한 삶의 핵심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정신의 불구에 비하면 몸의 불구는 불구도 아니라고, 그러니 어찌할 수 없는 몸에 좌절하지 말고, 어찌할 수 있는 마음을 보살피라고, 그 마음에 하늘의 마음을 채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외형을 잊고 덕을 채우라고, 얼마 남지 않은 정력을 쓸데없는 데 소모하지 말라고, 사람들은 잊어야 할 것은 못 잊고, 잊지 말아야할 것은 쉽게 잊지만, 그대는 잊어야할 것은 잊어 버리고, 잊지 말아야할 것을 잊지 말라고 당부합니다. 그 당부대로 살기 아득하지만, 마음 한 켠에 갈무리 해둡니다.    

 

현대사회는 불안의 위험과 재난의 불확정성에 항상 노출되어 있습니다. 이번에 우리나라가 겪은 물난리는 수많은 인명과 재산의 피해를 낳았습니다. 오늘 내가 안전하다고 내일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어제는 코로나더니, 오늘은 물난리입니다. 내일은 또 무슨 일이 우리에게 닥칠지 참으로 난감합니다. 과학기술이 발전하고, 자본이 축적된다고 해서 이 위험에서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재난으로 장애를 입거나 죽음으로 몰릴 수 있는 ‘위험사회’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이 총체적 위험은 개인의 잘못으로는 환원될 수 없는 지구적 위기이기에 그 거시적 해결책은 지구적 차원에서 해법을 찾아야 하고, 그 해법을 도모하는 일은 국가와 공동체의 체계적인 구상과 지속적인 실천의 문제입니다만, 그 위험에 노출된 사람들은 추상적 인간이 아니라 구체적 개인입니다. 이번 물난리로 반지하에서 살다가 간신히 구출되거나 결국 사망하게 된 사람들은 우리와 같은 하늘에서 같은 공기를 마셨던 우리의 이웃입니다. 우리 사이를 삶과 죽음으로 나눈 이 아득함을 나는 아직 실감하지 못합니다.

죽음은 까마득히 멀고, 삶은 너무도 가깝다고 생각했습니다만, 그들의 죽음 앞에서 죽음은 이처럼 가깝고, 삶이 참으로 아득합니다. 장자는 삶과 죽음을 하나로 여기라고 충고하지만, 나는 그들의 죽음을 위무할 방도를 찾지 못해 망설입니다. 망자는 저곳에 있고 나는 이곳에 있습니다. 나의 위무는 그들에게 가닿을 수 없습니다. 나는 이처럼 무력합니다.      


장자의 처방은 내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내 안에서 맥놀이치고 있습니다. 나는 그들의 죽음에 가닿지 못하고, 단지 나의 죽음과 장애를 상상할 뿐입니다. 그리하여 내가 다치거나, 망가지거나, 죽을 때 내가 너무 놀라지 않기를 바랍니다. 슬픔을 가라앉히고 고요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좋아하는 것으로 너무 들뜨고, 싫어하는 것으로 너무 속상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나에게 닥친 사건과 사고를 과장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바라보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어떤 결과가 초래되든 그 상태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생을 다시 시작할 수 없는 순간이 오면 가만히 이생을 놓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러한 바람은 오로지 내 안에서 나에게만 적용될 수밖에 없는 무력한 처방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만, 나는 이 무력함을 무기로 이 위험사회를 살아가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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