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경윤 Aug 23. 2022

장자를 달린다 6 : 진정한 스승은?

- 6편 <대종사(大宗師)>

참사람이 있어야만 참지식이 있다. [有眞人而後有眞知]

어떤 사람이 참사람인가? [何謂眞人]

옛날에 참사람은 [古之眞人]

작은 일도 거스르지 않고 [不逆寡]

성공을 자랑하지 않으며 [不雄成]

억지로 일을 꾀하지 않는다. [不謨士]    


당신은 존경할만한 스승이 있습니까? 당신의 주변에 스승으로 삼을 만한 사람이 있습니까? 있다면 어떤 분입니까? 학교를 오래도록 다녔지만 스승을 삼을 만한 분이 없다고 불만을 토로하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세 사람이 길을 가면 반드시 나의 스승이 있다.(三人行必有我師)”라고 말한 공자도 있습니다. 도대체 스승이란 무엇일까요?     


에리히 프롬은 『소유냐 존재냐』에서  인생의 스승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위대한 ‘인생의 스승들’은 소유와 존재 간의 선택을 그들 각 체제의 중심적인 문제로 삼아 왔습니다. 석가모니는 인간 발전의 최고 단계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재물을 탐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예수는 다음과 같이 가르칩니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사람이 만일 세계를 얻고도 자기를 잃든지 빼앗기든지 하면 무엇이 유익하리오’(누가복음 9:24~25) 

위대한 스승 마이스 에크하르트(Meister Eckhart)는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고 자신을 열고 ‘비게’ 하는 것, 자신의 자아가 끼여들지 않도록 하는 것이 영적(靈的)인 부(富)와 힘을 성취하기 위한 조건이라고 가르쳤습니다. 마르크스는 사치는 가난 못지 않은 큰 악덕이며, 우리의 목표는 풍성하게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풍성하게 ‘존재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프롬의 기준에 따르면 소유가 아니라 존재가 스승의 조건이 되네요.


장자 역시 참스승[眞人]의 조건으로 지식이 아니라 존재를 꼽습니다. “참사람이 있어야 참지식이 있다(有眞人而後有眞知)”고 말함으로 지식보다 존재의 우선성을 이야기합니다. 많이 아는 사람이 스승이 아니라, 참되게 사는 사람이 스승이 된다는 말이지요. 장자는 <대종사(大宗師)>에서 이러한 스승을 ‘진인(眞人)’이라 말합니다. 

그리고 진인의 특징을 열거합니다. 진인은 “작은 일도 거스르지 않고, 성공을 자랑하지 않으며, 억지로 일을 꾀하지 않습니다.” “잠을 자도 꿈을 꾸지 않고, 깨어 있어도 근심이 없습니다. 좋은 음식만 찾지 않고, 여유롭게 숨쉽니다.” “사는 것도 기뻐하고 삶을 잃어도 기뻐합니다.” 본문에 나오는 진인의 특징과 나의 삶을 비교해보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편애하지 않고, 명성을 좇지 않고, 스스로 즐길 줄 압니다. 편안하게 행동하고, 한가하고, 말수가 적습니다. 때에 알맞게 행동하고, 자연을 따릅니다. 낮과 밤이 있듯이 삶과 죽음을 운명으로 여깁니다. 물고기가 물 속에 거주하듯이, 진인은 자연의 길에 거주합니다. “대지는 우리에게 형체를 부여하고, 삶을 주어 우리를 수고롭게 하고, 늙게 하여 우리는 편안하게 하고, 죽음으로 우리를 쉬게합니다. 잘 살다가 잘 죽으면 됩니다.”        

그리고 그러한 경지에 도달한 친구 네 명을 소개합니다. 자사, 자여, 자려, 자래라는 이름의 친구들. 그들은 “없음을 머리로 삼고, 삶을 척추로 삼고, 죽음을 엉덩이로 삼는 자”이고, “삶과 죽음, 지속과 멸망이 한가지임을 알고 있는 사람”이었기에 기꺼이 서로 친구가 됩니다. 자여라는 친구가 큰 장애를 얻게 되자, 자사가 문명을 가서 묻습니다. “장애를 얻은 게 싫은가?”

그러자 자여는 대답합니다. “아니네. 내가 어찌 싫어하겠는가. 나의 왼팔이 조금씩 변하여 닭이 된다면, 나는 그 팔로 사람들에게 새벽을 알려 줄 것이네. 나의 오른팔이 조금씩 변하여 화살이 된다면, 나는 새를 맞추어 구워 먹을 것이고. 나의 궁둥이를 조금씩 변하여 수레바퀴처럼 되고 정신이 변하여 말처럼 된다면, 나는 그대로 타고 다닐 것일세. 따로 수레에 말을 멜 필요가 없게 되겠지. 이 모두가 때를 얻어 몸이 생기고, 자연의 변화로 그것을 잃게 되는 것이지. 때가 되어 자연의 변화에 순응하면 슬픔이나 즐거움이 끼어들 사이가 없지 않겠나. 이것이 묶인 것에서 해방되는 것이라네. 이전 육신이 나를 동여매었다가 하늘이 나를 해방시켰네. 내가 어찌 싫어하겠는가?”   

자여의 쿨함에 입을 떡 벌리고 놀라는 것도 잠시, 이번에는 죽음을 앞둔 자래에서 자려가 방문합니다. 그리고는 친구의 죽음 앞에서 놀리는 투로 말합니다. “자연의 조화가 위대하구먼. 자네는 어디로 가려는가? 하늘이 자네를 쥐의 간으로 만들까, 아니면 벌레의 다리로 만들까?” 그런 놀림 앞에서도 자래는 흔들리지 않습니다. 천지가 자신에게 형체를 주었다가 이제 죽음을 주어 쉬게 하려는데, 다시 무엇으로 태어나든 그것은 조물주의 영역이지 자신의 문제는 아니라고 말하지요. 그러면서 자신은 “깜빡 잠들었다가 문뜩 깨어나면 그뿐!(成然寐 蘧然覺)”이라 대답하지요.    

  

네 친구의 이야기에 뒤이어 친구의 죽음 앞에서도 누에를 돌보는 맹자반과 거문고를 타는 자금장, 어머니의 죽음 앞에 곡을 하면서도 울지 않았던 맹손재, 요임금에게 왕위를 부탁받았으나 거절한 허유와 그의 제자가 되려는 의이자, 좌망(坐忘)의 경지에 도달한 안회의 뒤를 따르고 싶다는 스승 공자 등의 인물들이 짧은 에피소드처럼 쭉 소개되어 있는데요. 소개되는 이야기는 모두 하나 같이 우리의 상식에 망치를 휘두르고, 무엇이 참된 삶인지에 대하여 근본적으로 묻고 있습니다.     


이렇게 장자가 소개하는 참스승[眞人]의 궤적을 따르다보면 어안이 벙벙해지고, 정신이 아득해집니다. 우리의 상식에서 한참을 벗어난 기인(奇人)들을 참사람이라고, 위대한 스승[大宗師]이라고 뻔뻔하게 소개하는 장자의 뱃심이 부럽기도 합니다. 도대체 왜 장자는 이러한 기인(奇人)들을 스승이라 소개하고 있는 걸까요? 세상에서 추구하는 지위나 명예, 건강과 장수, 성공과 부유함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기는 있는 걸까요? 심지어 장애와 죽음, 자존과 윤리마저도 초개(草芥)처럼 버리고 기꺼이 자신을 무화시키면서 자연의 흐름을 타고 놀며 변신을 즐기는 지유로운 사람들이 있을까요?   

   

내 주변에서는 결코 보기 힘든, 아니 존재 자체가 불가능에 가까운 이러한 사람들이 장자의 이야기에는 넘쳐납니다. 그리고 그 장자의 넘쳐남과 나의 빈곤함 사이의 거리감이 나를 당혹시키고 긴장하게 만듭니다. 마치 나에게 장자는 이렇게 묻고 있는 듯 합니다. 세상에서 떠받드는 스승 말고, 진정으로 너는 스승을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너에게 스승은 있는가? 너는 스승인가?     

이전 06화 장자를 달린다 5 : 장애가 없는 자 누구인가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