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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경윤 Aug 09. 2022

장자를 달린다 4 : 쓸모없기를 바랐다

- 4편 <인간세(人間世)>

나는 쓸모가 없기를 바란지 오래 되었다.[且予求無所可用久矣]

죽을 뻔 한적도 있었지만 이제야 뜻대로 되었다.[幾死, 乃今得之]

나의 쓸모없음이 나의 큰 쓸모다.[爲予大用]    

 

《장자》에서 가장 많이 에피소드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사람은 장자(26번)도 아니고 노자(16번)도 아니고 공자입니다. 헤아려 보았더니 무려 38번이나 등장하더군요. 《장자》의 <도척>이나 <어부>편에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공자가 등장하여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이번에 다루는 4편 <인간세>편에서도 거의 3분의 2 정도의 분량을 공자와 안회의 이야기에 할애합니다.


장자가 왜 자신의 이야기에 공자를 많이 등장시키는 걸까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장자 당시에 공자가 ‘셀럽’이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공자를 칭찬하든 씹든 어쨌든 공자의 에피소드는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끌기에 적당한 소재였으리라 짐작됩니다. 장자는 《장자》에 크게 두 종류의 공자를 등장시킵니다. 칭송(계승)의 대상으로서의 공자와 비판의 대상으로서의 공자. 장자가 칭송하는 공자는 《논어》에 나오는 공자와는 사뭇 다릅니다. 자신의 정치적 소신을 굽히지 않고 밀고 나갔던 공자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오히려 정치판으로 출사하는 애제자 안회를 만류하는 신중한 모습을 보입니다. (그에 비하면 《논어》에서는 한 번도 출사의 표시를 하지 않았던 안회가 여기서는 별의별 수단을 써서든 출세하려는 모습을 보입니다.) 《논어》에서는 볼 수 없었던 공자와 안회의 모습을 감상하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안회는 폭군이 다스리는 위나라로 가서 평소에 공자가 가르친 대로 실천하여 그 어지러운 나라를 바르게 만들고 싶어합니다. 그렇지만 공자는 폭군이 다스리는 나라에 갔다가 뜻조차 펼치지 못하고 죽음을 당할 수 있다고 경고하지요. 게다가 안회가 아직은 인간세상에 나아가 자신의 뜻을 펼치기에는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쓴소리를 합니다. 결국 스승의 만류를 받아들인 안회는 도대체 무엇을 준비해야 하느냐고 공자에게 묻습니다. 그러자 공자는 “마음을 굶기라[心齋]”고 말합니다.


고행하는 싯다르타

예로부터 단식은 수행의 가장 중요한 수단이었습니다. 환웅과 결혼한 웅녀가 아직 곰이었을 때, 100일 동안 마늘과 쑥만 먹고 동굴에 있으라고 한 것도 자신의 동물성을 약화시키고 인간성을 발견하는 수행방법이었지요. 예수도 사막에서 40일을 단식했고, 부처도 깨닫기 전 몇 년을 극단적으로 단식하며 수행했습니다. 이처럼 말 그대로 단식은 몸을 깨끗하게 하는 수단이었을 뿐 아니라 육체적 욕망을 끊어내는 가장 원초적인 방법이었지요. 그런데 <인간세>에서 공자는 안회에게 몸의 단식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단식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마음을 굶겨 마음이 텅비어 있을 때 그곳으로 도(道)가 모이게 됩니다. 도란 무엇입니까? 하늘의 마음입니다. 자신의 욕망이 아니라 하늘의 뜻이 이루어지는 마음이지요. 기독교적으로 예수의 기도처럼 “내 뜻대로 말고, 하느님의 뜻대로 하시라”는 마음이고, 불교적으로는 자신을 비워[無我] 부처에게 자리를 내주게 되는 것이지요. 출세하고 성공하고 높은 자리에 오르는 ‘최상의 삶’이 아니라, 흔적없이 살면서 하늘의 일을 수행하는 ‘최적의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바로 목수 장석과 쓸모없는 나무와의 대화입니다. 하루는 목수 장석이 좋은 목재를 구하기 위해 제자와 함께 제나라로 가는 도중 엄청나게 큰 나무를 만나는데, 제자는 그 크기에 감탄하지만, 스승인 장석은 이내 크기만 클뿐 목재로는 쓸 수 없는 산목(散木)임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실망하여 집으로 돌아왔는데, 장석에 꿈 속에서 바로 그 산목이 등장하여 나무들의 역사를 이야기합니다. 좋은 열매가 맺히는 나무는 가지가 꺾여 삶이 괴롭게 되고, 곧게 자란 나무들은 그 용도에 맞춰 목숨대로 살지 못하고 이내 잘리게 되는 모습을 보면서, 제발 인간에게 쓸모가 없기를 간절히 바라고 바라 드디어 소원을 이루게 되었으며, 그래서 잘리지 않고 크게 자라 둘레가 백 아름이나 되고 높이는 산보다 높고, 그늘은 수천마리의 소를 가릴 만큼 자랐다는 것이지요.


인간이 바라보는 쓸모와 나무가 바라보는 쓸모는 다를 수밖에 없지요. 인간에게는 쓸모없음이 오히려 나무에게는 거대한 쓸모가 되는 이 아이러니를 읽으며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인간에게 좋은 말은 잘 달리는 말이겠지만, 말에게 좋은 말은 뭘까요? 인간에게 좋은 개는 순하고 말 복종하는 개겠지만, 개가 좋아하는 개는 어떤 개일까요? 부모에게 좋은 자식은 성격 좋고 성적 좋은 자식이겠지만, 정작 자식의 입장에서 정말 좋은 것은 뭘까요? 직장에서 원하는 직원과 직원이 원하는 자기가 같을까요? 국가권력이 원하는 국민과 각 개인이 원하는 자신의 모습은 같을까요? 다를까요?


한 편의 쓸모가 다른 편에게는 죽음이 될 수도 있는 현실이 오늘날입니다. 한병철은 현대사회를 성과사회라 규정하고 성과를 내기 위해 쓸모를 스스로 창출하려다가 과로와 정신질환을 앓게 되는 피로사회가 되어 버렸다고 말합니다. 도대체 나는 어디에 쓸모가 있기를 바라는 걸까요? 무엇보다 먼저 나는 나에게 쓸모있는 존재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쓸 데 없는 욕망에 사로잡혀 죽음으로 자신을 몰고가는 쓸모를 굶기고, 그래서 나를 죽이는 존재에게는 쓸모없는 놈처럼 기꺼이 취급당하면서, 나 자신을 멋지게 살리는 쓸모를 찾아봐야겠습니다. 마음을 굶긴 안회처럼, 간절히 쓸모없기를 바랐던 산목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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