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경윤 Jul 26. 2022

장자를 달린다 2 : 하늘의 소리를 듣는 사람

- 2편 <제물론(齊物論)>

옳음 때문에 그름이 있고 [因是因非]

그름 때문에 옳음이 있다. [因非因是]

따라서 성인은 옳고 그름을 떠나 [是以聖人不由]

하늘에 이를 비추어본다. [而照之於天]

‘있는 그대로 긍정’한다. [亦因是也]     


나는 누구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무한에 가깝습니다. 남자, 한국인, 중년, 가족의 아빠, 작가, 인문학자 ……. 이런 짧막한 답은 아주 짧은 기간에만 부분적으로 맞는 답입니다. 시간이 흐르거나 조건이 바뀌면 언제든지 변할 수 있는 것을 정답이라 할 수는 없습니다. 불교에서는 “부모님에게서 태어나기 전에 너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있습니다. 인간이라는 몸을 입기 전에 나의 모습을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코스모스>를 쓴 칼 세이건

나의 근원을 굳이 따져묻는다면 칼 세이건의 말에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우리의 DNA를 이루는 질소, 치아를 구성하는 칼슘, 혈액의 주요성분인 철, 애플파이에 들어 있는 탄소 등의 원자 알갱이 하나하나가 모조리 별의 내부에서 합성됐다. 그러므로 우리는 별의 자녀들이다.” 우리는 별에서 왔습니다. 부모에게서 태어나기 전 우리는 별이 만들어낸 화학물입니다. 거기에 칼 세이건은 유머 한 스푼을 추가합니다. “헤럴드 모로위츠가 한때 재미있는 계산을 한 적이 있다. 사람 한 명을 구성하는 데 필요한 각종 분자 물질을 화공 약품 가게에서 구입하려면 돈이 얼마나 드나 알아봤더니 약 1000만 달러(120억 원)라는 계산이 나왔다. 내 몸값이 이 정도 나간다니 기분이 약간은 좋다.”     


불교에서는 모든 존재를 상호의존적이고 가합(假合)적인 것으로 여겼습니다. 이러한 생각에 동의한다면 존재의 경계가 무척 희미해집니다. 나는 공기를 마시고, 식물과 동물을 먹으며, 다른 사람들의 노동의 결과물에 의존하고, 하늘을 이고 땅에 기대어 살고 있습니다. 나라는 개체는 결코 자기완결적이지 않습니다. 나는 일시적이고, 열린 존재의 모습을 가지고 있을 뿐입니다. 나는 공기-나이고, 식물-나이며, 동물-나이고, 타자-나이며, 하늘-나이고, 땅-나입니다. 또한 그 모든 것이 아닐 수 있습니다. 불교적으로는 ‘무아(無我)’이며, 비상비비상(非常非非常)이고, 색즉시공(色卽是空)이며 공즉시색(空卽是色)입니다. 그러니까 나 아니라고 말할 것도, 나라고 말할 것도 없습니다.      


장자의 책 2편인 <제물론(齊物論)>은 스승인 남곽자기와 제자 안성자유의 대화로 시작합니다. 어느날 제자가 스승의 모습을 보니 이전과는 판연히 달라 보입니다. 뭔가 생기가 없어 보이고 마른나무 장작 같은 상태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이는 노화현상이 아닙니다. 수행의 결과입니다.) 스승은 제자의 안목을 칭찬하며, 자신은 ‘오상아(吾喪我)’ 즉 자기 자신을 잃어버린 경지에 도달했다고 말합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무아(無我)의 경지와 유사하달까요.


그 경지에 도달한 사람은 어떻게 변할까요? 무엇보다 인식의 지평이 확대됩니다. 좁은 세계에서 넓은 세계로! 인간의 세계에서 자연의 세계로! 스승인 남곽자기의 표현에 따르면 ‘사람의 피리소리’를 듣는 단계에서 ‘땅의 피리소리’ 뿐만 아니라 ‘하늘의 피리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경지로 변화합니다. 인간이 볼 수 있는 세상은 가시광선 안쪽입니다. 빛의 세상에 아주 일부분일 뿐이지요. 또한 인간이 들을 수 있는 소리도 가청영역 안쪽입니다. 저주파나 초단파는 결코 들을 수 없습니다. 자신이 보거나 듣거나 경험한 세상이 다이고, 그것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만큼 단견(短見)은 없을 것입니다. 스승은 지금 나와 너, 내아(內我)와 외물(外物)의 구분이 사라지고 둘이 통일된 마음상태에 이른 것입니다. 이를 주객합일된 마음의 경지라 합니다.

그러한 경지에 도달한 사람은 자신의 눈에서 나온 빛으로 세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빛에 비추어 세상을 보는 조지어천(照之於天)의 시선을 갖게 됩니다. <제물론>에 뒤따르는 에피소드는 조삼모사(朝三暮四)이야기입니다. 인간(주인)과 원숭이가 서로가 서로를 비추며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방식으로 만납니다. 이를 장자는 ‘사물을 그대로 봄[因是]’라 하고, 만물평등의 하늘의 저울[天鈞]이라 하며, 두 길을 함께 걸음[兩行]이라 합니다.

이처럼 장자의 세계는 경계도 이름도 없는 하늘의 시선이고, 은은한 빛의 시선이지요. 마치 노자가 이야기한 은은한 빛으로 먼지와 하나가 되는 화광동진(和光同塵)의 세계입니다.       


무지의 세상에 빛을 비추는 세계시민 디오게네스

아테네 광장에서 개처럼 남루한 생활을 했던 이방인 철학자 디오게네스에게 아테네 원주민들이 그의 출신을 묻자, 디오게네스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나는 세계시민이다.” ‘코스모폴리탄’이라는 말을 최초로 했던 철학자가 바로 디오게네스입니다. 국적이나 출신을 묻는 사람에게 그 상위개념을 말함으로 인식의 전환을 요구했던 것이지요. 땅에는 경계가 있지만, 하늘에는 경계가 없습니다. 지역과 나라와 종교와 이념으로 그려진 지도는 땅에 속합니다. 하늘에 속한 사람은 이 모든 경계를 허물고, 자신의 앎을 지우고, 하늘의 밝음을 찾습니다. 잘 모르겠다고요. 모르겠다는 앎으로, 웅변보다 침묵으로, 우리 바깥에 있는 소리를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어디에 속해있습니까? 어디에서 오는 소리가 들리십니까?     

이전 02화 장자를 달린다 1 : 그 무엇에도 갇히지 말라.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