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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경윤 Aug 02. 2022

장자를 달린다 3 : 조심조심 차근차근 천천히 편안하게

- 3편 <양생주(養生主)>

어쩌다 때를 만나 태어나고 [適來夫子時也]

어쩌다 때가 다해 세상을 떠나네. [適去夫子順也]

어느 때든 편안하게, 어느 곳이든 순리대로 살면 [安時而處順]

슬픔도 즐거움도 끼어들지 못하네. [哀樂不能入也]        

   

도메니키노, <쿠마에의 무녀>

영국의 시인 엘리어트의 시 <황무지>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나는 쿠마에라는 곳에서 내 눈으로 직접 무녀를 보았소. 그녀는 새장 안에 매달려 있었는데, 그녀를 구경하던 소년들이 ‘너는 무엇을 원하니?’라고 묻자 ‘나는 죽고 싶다’라고 대답하더이다.” 사연인 즉 이렇습니다. 한 무녀가 신에게 영원히 살게 해달라고 빌었습니다. 신은 그녀의 소원을 들어주었지요. 그런데 무녀의 소원에는 중요한 조건 하나가 빠져 있었습니다. ‘늙지 않고!’ 그후 무녀는 죽지도 못하고 계속 늙어갑니다. 그렇게 세월이 흐르자 점점 몸이 쪼그라들어 이제는 새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지요. 이제 영원히 사는 것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가 되었습니다.


누구나 잘 태어나 잘 먹고 잘 살다가 잘 돌아가기를 바랍니다. ‘잘’에 대한 해석에 따라 삶의 모습이 달라지긴 하겠네요. 자본주의 사회의 최고의 가치인 부(富)를 기준으로 말하자면, 금수저를 물고 태어나 죽을 때에도 금수저가 물려있는 채로 죽기를 바라겠지요. 다다익선(多多益善)이라고 금수저가 많으면 많을수록 더 잘 사는 것이라 생각할 수도 있겠네요. 무한성장과 무한증식의 욕망은 맹목의 바이러스처럼 우리의 삶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더 높이, 더 오래, 더 많이! 더더욱 많이!

아, 하나가 더 있네요. 일하지 않고! 편안하게! 얼마 전 한 은행광고를 보며 기함(氣陷)을 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부자가 될 권리가 있다.”라고 말하며 “내가 일하면 근로자, 돈이 일하게 하면 투자자”라고 꼬드깁니다. 일하는 노동자를 조롱합니다. 하긴 초등학생에게 장래희망을 말해보라 했더니 ‘건물주’라고 대답했다는 얘기를 듣고 쓴웃음을 지었던 적이 있습니다. 불로소득(不勞所得)으로 살아가는 것이 꿈인 사회에서 노동하는 사람들은 점점 비참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정말 이렇게 삶은 비참한 것일까요?     


장자의 3편 <양생주(養生主)>는 말 그대로 삶을 보살피는 ‘양생’의 방법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순서를 따라 읽다보면 ‘연독(緣督)’이라는 단어에서 잠시 멈추게 됩니다. 영어로는 가운데를 따르라는 뜻의 ‘Follow the middle’로 해석이 됩니다. 앎에 대한 과도한 욕구와 선악에 대한 극단적 경계를 허물고 중심을 지키며 삶에 충실하라고 말합니다. 유학적으로 표현하면 중용(中庸)의 삶이 될텐데요. 그렇게 살다보면 4가지 혜택을 입습니다. 몸을 훼손하지 않는 보신(保身), 균형잡힌 삶인 전생(全生), 부모 가족과 원만하게 지내는 양친(養親), 자신의 수명대로 생을 다하는 진년(盡年)입니다.


포정해우

그렇게 이야기가 지루해질 때쯤, 드디어 포정(庖丁)이 문혜군 앞에서 소를 해체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19년 동안 소를 해체해온 포정은 이제 소를 해체할 때 자신도 잊고 소마저 잊고 마치 춤추듯이 소의 결을 따라 칼날을 휘두릅니다. 그렇게 소 한 마리를 다 해체해도 소 잡은 칼날은 방금 숫돌에 갈아놓은 것처럼 빛납니다. 이를 바라본 문혜군이 칭찬을 아끼지 않으며 ‘양생(養生)’의 도를 배웠다고 하지요. 소를 잡는 것은 죽이는 일이고, 양생은 살아가는 일인데 어찌 같은 것으로 취급했을까요?

포정의 칼날이 바로 우리 삶의 모습입니다. 포정의 칼날은 소의 결을 따라 움직입니다. 뼈를 만나면 뼈를 부수지 않고 조심조심 돌아갑니다. 함부로 행동하지 않고 천천히 움직입니다. 그래서 날이 세월이 흘러도 상하지 않습니다. 장자는 말합니다. 어떠한 일을 만나도 마음으로 대하면 그 틈이 보일 것이다. 그 틈의 결을 따라 살아가라. 물론 도중에 힘든 일, 어려운 일을 만나게 된다. 그러면 서두르지 말고 조심조심 천천히 마음 상하지 않게 처리하라. 삶도 망치지 말고, 마음도 망치지 마라.     


다리가 잘린 우사(右師)는 잘린 다리에 연연해하지 않습니다. 과거와 현재를 비교하지않고 현재의 삶에 충실합니다. 연못에 사는 꿩은 힘겹게 살아가지만 새장에 갇혀 산해진미를 즐기는 다른 새를 부러워하지 않습니다. 그런 삶은 잘 사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노자(老子)가 죽자 친구인 진실은 조문을 가서 세 번 곡하고 나와버립니다. 그의 제자가 조문의 소홀함을 지적하자, 오히려 진실은 조문의 과도함이 문제라며 삶과 죽음의 문제는 즐거움도 슬픔도 끼어들 필요 없는 우주의 일상사라고 말합니다. 마치 “불은 쌓아놓은 장작을 다 태우고도 계속 번져 꺼질 줄을 모르는 것처럼” 하나의 생명은 자신의 생을 다하면 그렇게 육체의 구속에서 풀려나게 된다고, 그러니 이를 모르고 슬퍼하면 오히려 그것이 하늘을 배신하는 행위가 되는 것이지요.      


장자는 삶을 보살피는 길, 잘 사는 길을 보여주겠다면서 소 잡는 포정(노동자), 다른 잘린 장애인 우사, 힘겹게 살아가는 꿩, 죽어버린 노자를 사례로 듭니다. 자본주의적 가치와 시선으로 보면 모두 루저(loser)들입니다. 그러자 장자의 자유의 가치와 평등의 시선으로 보면 이들이야말로 진정한 인생의 승리자들입니다. 이러한 등장(인)물의 입을 빌어 이렇게 말하고 있는 듯합니다. 자신의 욕망을 좇아서 정신없이 살아가지 마라. 너무 잘난 척 하지 마라. 몸과 마음을 잘 보살피면서 한 쪽으로 치우지지 말고, 가운데를 지켜라. 주변사람들에게 상처주지 말고, 조심조심 차근차근 천천히 살다가 죽을 때가 되면 미련없이 육체의 구속에서 벗어나 하늘로 나아가라. 그게 양생(養生)이고, 웰빙(well-being)이고, 하늘의 결을 따라 타고 노는 것이다. 그리고 천상병 시인의 고백처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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