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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경윤 Jul 19. 2022

장자를 달린다 1 : 그 무엇에도 갇히지 말라.

- 1편 <소요유(逍遙遊)>

자기를 버린 사람, 지극한 사람[至人無己]

공적을 떠난 사람, 신령한 사람[神人無功]

명예를 벗어난 사람, 거룩한 사람[聖人無名]


어딘가에 갇혀본 적이 있나요? 예를 들면 어린 시절 장롱이라든지, 화장실이라든지 창고라든가 뭐 이런 곳에 말입니다. 갇혀있다는 것은 갇힌 공간의 크기도 문제지만 갇혔다는 생각이 주는 공포는 더 큰 문제가 됩니다. 폐소공포증(閉所恐怖症, Claustrophobia)에 걸릴 수도 있습니다. 잠시 갇혀있어도 무서운데 장기간 갇혀있다면 그 공포가 장난이 아니겠지요. 감옥을 경험해본 사람이라면, 특히 독방에 갇혀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거기서 오는 공포와 무기력은 가히 상상을 넘어선다는 것을 아실 겁니다.  


자신은 갇힌 적이 없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습니다. 정말 그럴까요? 닫힌 곳에 너무 넓고 커서 모르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국가와 민족에 갇힐 수도 있고요. 사상과 관념에 갇힐 수도 있습니다. 사피엔스는 부족 본능이 특화된 종이라서 같은 종족에게는 턱없이 친절하면서도 다른 종족에게는 까닭없는 잔인함으로 대하기도 합니다. 나라가 다르다는 이유로,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민족이 다르다는 이유로,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성별이 다르다는 이유로 사피엔스는 상상을 불허하는 폭력을 행사할 수도 있습니다.


갇힌다는 것은 제약이 있다는 것이고, 제약이 있으면 부자유스럽습니다. 자유롭지 않으니 어색하고 편안하지 않습니다. 편안하지 않으니 괴롭습니다. 생각도, 말도, 행동도 모두 편안하지 않기에 삶이 불안하고 관계도 삐그덕거립니다. 갇혀있기에 생겨나는 일들인데, 사람들은 갇혀있다는 사실을 모른 채 모두 자기의 잘못이라고 자학하거나, 남탓을 하며 타인을 증오합니다.


물고기 한 마리가 있습니다. 피라미라고 상상해봅시다. 작은 어항이라면 답답하겠지만 바다에 풀어놓으면 바다에 갇혀있다는 생각을 못할 겁니다. 너무 크니까요. 그런데 몸의 길이가 수천리에 해당하는 물고기라면 어떨까요? 꼬리짓 몇 번에 한국과 중국의 해변을 찍게 된다면 분명 갇혀있다는 사실에 답답할 겁니다. 어쩌면 좋을까요? 바다보다 더 크고 넓은 곳이 있다면 하늘이 있습니다. 바다에서 놀지 못한다면 하늘에서 놀아야지요. 그래서 거대한 새[鵬]로 변신합니다.   

화이위조(化而爲鳥), 물고기가 변하여 새가 됩니다. 《장자》에 처음 등장하는 에피소드입니다. 이처럼 장자 1편 <소요유>에는 갇힌 존재와 풀린 존재의 대비로 찬란합니다. 물고기 곤(鯤)과 새 붕(鵬), 나라에 갇힌 요임금과 나라에서 벗어난 허유(또는 막고야산에 사는 네 명의 스승), 송나라의 모자장수와 머리카락이 없는 월나라 사람, 박씨의 쓸모에 갇혀있는 혜자와 쓸모에서 벗어난 장자, 세탁일에만 손 안트는 약을 쓰는 사람과 전쟁터에서도 쓰는 나그네 등등. 이런 사람들을 등장시켜 장자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바로 진정으로 자유를 원한다면 삶이든 생각이든 행동이든 갇혀있으면 안 된다는 겁니다.


문명인은 억지로 세상을 만들어 그 세상에 자신을 가둡니다. 자신만 가둘 뿐 아니라 남들도 그 감옥에 밀어넣습니다. 그러나 자유인은 스스로 그러할 뿐, 억지로 꾸미거나 만들지 않습니다. 자유인은 갇혀있지 않습니다. 명예나 공적, 지위나 권세, 심지어는 자기라는 감옥을 벗어던지고 대자연의 흐름과 하나가 되어 모든 흐름의 변화에 접속하면서 끝없이 놀 수 있습니다. 감옥에서 벗어나고 경계를 허물고, 담 없는 마을[無何有之鄕]에서 노는 사람, 장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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