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경윤 Sep 06. 2022

장자를 달린다 8 : 자신을 즐기라

- 8편 <변무(騈拇)>

내가 말하는 훌륭함은 인의가 아니라 타고난 본성에 맡기는 것. 

[吾所謂臧者, 非所謂仁義之謂也, 任其性命之情而已矣.]

내가 말하는 귀밝음은 남의 소리를 듣는 것이 아니라 자기 내면의 소리를 듣는 것 

[吾所謂聰者, 非謂其聞彼也, 自聞而已矣]. 

내가 말하는 눈밝음은 남의 모습을 보는 것이 아니라 자기 내면을 관조하는 것.

[吾所謂明者, 非謂其見彼也, 自見而已矣.]       

        

《장자》 외편의 첫 번째 장은 <변무(騈拇)>편입니다. ‘변무(騈拇)’라는 말은 붙어버린 발가락이라는 뜻이지요. 보통은 발가락이 다섯 개이지만 두 발가락이 붙어서 4개가 되버린 경우입니다. 이외에도 ‘육손이’는 손가락이 하나 더 나와서 6개의 손가락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지칭하는 말이지요. 이런 사람들을 정상인(?)들은 문제가 있는 사람으로 취급합니다. 심지어는 발가락을 가르거나 손가락을 잘라서라도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보기도 하지요.      


그런데 장자는 이런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 남의 군더더기만 볼 줄 알지 정작 자신의 군더더기는 볼 줄 모르는구나. 그러면서 그 예로 눈이 너무 밝은 사람, 귀가 너무 밝은 사람, 인의(仁義)에 너무 밝은 사람들은 색깔, 소리, 도덕에 예민하여 자신의 감각을 기준으로 남들을 평가하고, 다른 사람이 살아가는 모습을 비난하고, 높은 기준을 세워 남에게 강요하는 잘못을 범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덧붙여 화려한 말재주와 아름다운 글재주를 가지고 있는 지식인들은 자신의 말과 글로 궤변을 늘어놓으며 천하를 왜곡하고 있으니, 이들이야말로 천하의 골칫거리가 아닌가?

본래 네 발가락을 가진 사람이나 여섯 손가락을 가진 사람은 그것을 싫어하지 않았다. 다리가 길어도 남는다고 생각하지 않고, 다리가 짧다고 모자란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오리 다리가 짧다고 이어주고, 학의 다리가 길다고 끊어주면 슬퍼할 것이다.” 본래의 모습 그대로 그대로 두라. 그러면 걱정은 스스로 없어질 것이다.      


장자는 각자 자신의 생긴대로 본성대로 근심없이 살아가는 세상을 바랐습니다. 자연은 곧으면 곧은 대로, 굽으면 굽은 대로, 둥글면 둥근 대로, 모나면 모난 대로, 합쳐지면 합친 대로, 흩어지면 흩어진 대로 자연스럽게 살아갑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굽은 나무에 줄을 그어 곧게 만들고, 둥근 나무를 자로 그어 모나게 만듭니다. 인위(人爲)와 강제가 있으니 자연스럽지 않습니다. 인간의 삶도 마찬가지. 본성대로 자연스럽게 살아가도록 자유를 허용하는 것이 아니라 온갖 윤리와 도덕으로 생각과 행동을 규제합니다. 그리고 평가하고 비판하고 차별합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어느새 자신의 소리를 듣고, 내면을 바라보고 본성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남들의 소리를 듣고, 남들의 모습을 바라보고, 남들이 원하는 대로 살아가게 됩니다. 

이러한 것이 인생이라면 결국 우리는 남의 즐거움을 채우느라 자신의 즐거움을 잊고 사는 것 아닐까요? 남들이 원하는 소리를 내고, 남들이 원하는 모습을 하고, 남들이 즐거워하는 것을 살아가느라 우리는 점점 우리를 잊어 버리게 됩니다. 

장자는 이에 대한 재미난 비유를 소개합니다. 염소를 치는 계집종과 사내종이 염소를 잃었는데, 이유를 물은 즉 계집종은 놀다가 잃었다하고, 사내종은 책을 읽다가 잃었다고 변명합니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염소를 잃었다는 점은 같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현자로 알려진 백이는 명분 때문에 수양산에서 목숨을 잃었고, 천하의 도적으로 알려진 도척은 이익 때문에 동릉산에서 목숨을 잃었는데, 이유야 다르지만 본성을 해치고 목숨을 잃었다는 점은 같다고 말합니다. 장자가 보기에는 인의(仁義)나 재물(財物)이나 그로 인해 목숨을 잃었다면 도긴개긴입니다.     


철학자 한병철은 근대의 규율사회는 남의 명령을 따라서 자신의 삶이 착취되었는데, 오늘날의 성과사회는 자신의 명령을 따라 자신을 착취하는 더 비참한 사회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과연 ‘자신의 명령’일까요? ‘자본의 명령’을 자신의 명령이라고 착각하는 것은 아닐까요? 자본이 원하는 존재로 자신의 교환가치를 높이려는 노력은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스펙을 쌓고, 다이어트를 하고, 성형을 하고, 영혼을 끌어모아 재산을 증식하려는 현대인은 자신을 즐기는 자가 아니라, 자신을 학대하는 자입니다. 결국 자신을 위한다고 하지만 자본을 위해, 부의 획득을 위해 자본의 회전 맷돌에 자신을 갉아넣고 있는 거 아닐까요.    


그러니 “남의 즐거움을 위해 즐거워하지 말고[不適人之適] 자신의 즐거움을 즐기라![自適其適]”는 장자의 충고는 성과사회를 살아가는 현대인에게도 유효한 지침이 될 듯합니다. 무한속도로 질주하는 아찔한 무한괘도에서 내려, 자신의 고유한 속도 속에서 유유자적(悠悠自適)한 삶을 즐기는 방식을 찾아봐야겠습니다.

이전 08화 장자를 달린다 7 : 지도자를 잘못 만나면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