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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경윤 Sep 13. 2022

장자를 달린다 9 : 말의 행복

- 9편 <마제(馬蹄)>

말은 발굽으로 눈서리를 밟고[馬, 蹄可以踐霜雪]

털로는 바람과 추위를 막는다.[毛可以禦風寒]

풀을 뜯고 물을 마시며 다리를 높이 들어 달린다.[齕草飮水, 翹足而陸]

이것이 말의 참된 본성이다.[此馬之眞性也.]

좋은 집과 침대가 있다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雖有義臺路寢無所用之.]     


내가 초등학교(당시의 언어로는 국민학교) 5학년이 되자, 교과서에 국민교육헌장이 실렸습니다. 그리고 그 헌장을 외우지 못하는 학생들은 체벌을 받았을 뿐 아니라 귀가조차 하지 못했지요. 초등학생이 이해할 수 없는 단어가 넘쳐났던 그 헌장의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땅에 태어났다.” 나는 담임선생님께 맞아가며 ‘중흥’이라든가, ‘사명’에 대하여 무한반복으로 되뇌었습니다. 나중에 머리에 ‘피가 마를’ 때에 그 단어들의 뜻은 알게 되었지만, 정말로 내가 그러한 사명을 띠고 태어났다는 것에는 동의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 난해한 문장을 만들어 교과서에 실은 사람이나, 그 문장들을 외우도록 시킨 사람들이나 못 외우면 체벌을 한 사람들이나 모두가 어린이들을 학대한 범죄자이며 공범입니다.  


교회를 다니면서 무의식적으로 불렀던 노랫말에도 이와 유사한 것이 있습니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노랫말의 얼핏 듣기에는 좋은 말인 것 같지만, 어린 시절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라난 아이에게는 저주와 같은 말일 수도 있습니다. 특히 기독교처럼 죄의식을 강조하는 종교에서는 사랑받지 못함이 죄 때문이라는 말도 안 되는 논리를 펼치기도 합니다만, 떡을 주지는 못할망정 빰을 때려서는 안 됩니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은 특정한 목적을 가지고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리처드 도킨슨은 《이기적 유전자》에서 인간은 유전자 보존을 위해 맹목적으로 프로그램된 기계에 불과하다고 주장했지만, 현대사회의 출산률 저하나 비혼이 늘어나는 것을 보면 인간사회가 반드시 그러한 방향으로 진화할 것 같지도 않습니다.

    

《장자》 외편의 두 번째는 <마제(馬蹄)>라는 이름을 달고 있습니다. 단어의 뜻을 그대로 번역하면 ‘말발굽’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처음 소재로 말이 등장합니다. 태어난 대로 자연스러운 삶을 살아가는 말과 뛰어난 조련사에 의해 훈련된 말 중에서도 어느 상태를 말 자신은 좋아할까요? 자연(自然)과 인위(人爲)의 대조는 계속됩니다.

장자는 전설적인 말조련사 백락(伯樂)을 비판합니다. “백락은 말을 잘 다스린다면서 말에게 낙인을 찍고, 털을 깎고, 발굽을 다듬고, 굴레를 씌우고, 고비와 띠를 매달아 마굿간에 넣습니다. 그 결과 열에 두세 마리는 죽게 됩니다. 게다가 말을 조련한다는 명목으로 굶기고 목마르게 하고 뛰게 만들고 갑자기 달리게도 하며, 달리는 말에 온갖 장식을 달아 거추장스럽게 하고 채찍으로 다스립니다. 그러자 남은 말 중 반도 넘게 죽게 됩니다.”


장자는 이러한 논리를 더 확장해서 도공과 목수에게 적용시킵니다. 흙을 이용하여 그릇을 만드는 일이나 나무를 이용하여 집이나 가구를 만드는 일은 인간에게는 좋은 일일지 모르지만 흙과 나무의 입장에서 보면 참으로 가혹한 짓을 한 것입니다. 장자 이야기의 끝은 인의를 주장하고 예약을 제정하여 백성을 계몽하고 선악을 분별하는 성인을 비판하는데에 이르러 절정에 도달합니다. 장자가 보기에는 인간사회에서 모두가 떠받드는 성인(聖人)은 자연스러운 삶을 파괴하고 참된 도덕을 훼손한 잘못을 범한 사람에 불과합니다.


기독교 《성서》에도 낙원과 실낙원이 있듯이, 《장자》에도 낙원이 있고 실낙원이 있습니다. 장자의 낙원[至德之世]는 짐승과 함께 살고[同與禽獸居], 만물이 한 가족처럼 더불어 살았습니다[族與萬物竝]. 지식이 없어도[同乎无知] 덕성이 떠나지 않고[其德不離], 욕심 없이[同乎无欲] 소박하게 살았습니다[是謂素樸]. 밥을 먹으면 즐거워하고 배를 두드리면서 놀았습니다[含哺鼓腹]. 그런데 성인이 등장하여 인의를 행하니 세상이 의혹을 품고, 예악을 정하니 분별이 생겼습니다. 실낙원이 사작된 것입니다. 그 후에 사람들은 지식을 쌓고 이익을 좇기에 급급합니다. 이 모두가 성인의 잘못입니다.

    

유학자들은 성인을 문명을 일으킨 자로 높이 떠받드는데, 장자는 도리어 문명을 일으킨 성인이야말로 인간 본연의 삶을 망가뜨린 잘못을 범했다고 비판하고 있으니, <마제>편에서는 유학자들과 타협할 지점이 없어보입니다. 비록 장자의 성인 비판이 거칠은 평가로 인해 과도해보이고, 삶에 대한 책임을 부모에게 전가하는 것처럼 무책임해 보이기까지 합니다만, 그럼에도 성인(聖人)으로 지칭되는 권력자들이, 오늘날로 치면 가깝게는 부모나 선생으로부터, 확장하면 회사 등 조직이나 국가권력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삶에 개입하여 의식, 무의식적으로 지배하고 조정하는 현대사회를 생각해보면, 장자의 도저한 비판정신이 통쾌하기도 합니다.     


공자는 나의 50에 하늘의 뜻[天命]을 알았다고 했는데, 나는 50이 넘어가면서 점점 하늘의 뜻이 무엇인지 모르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만약에 하늘의 뜻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아무런 구속이 없이 자유롭게 살아라[一而不黨, 命曰天放.]”라는 장자의 말에 가깝지 않을까 어림짐작할 뿐입니다. 그저 바라는 것은, 남의 삶에 쓸데 없이 개입하고, 청년들에게 함부로 충고하는 꼰대나 되지 말았으면 하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미쳐 날뛰고 끝없이 질주하는 속도를 낮추고, 거품을 만들어 내는 굴레도 벗어버리고, 무거운 안장도 풀어야겠습니다. 조금은 가볍게 조금은 자유롭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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