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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경윤 Oct 25. 2022

장자를 달린다 14 : 원숭이에게 옷 입히기

- 14편 <천운(天運)>

효도니 우애니 사랑이니 정의니 [夫孝悌仁義]

충성이니 믿음이니 정숙이니 청렴이니 하는 것들은 [忠信貞廉]

모두 본래 모습을 애써 노예로 만드는 것입니다. [此皆自勉以役其德者也]

부족함이 많습니다. [不足多也]     

 

장자 14편은 수많은 질문으로 시작됩니다. “하늘이 움직이나? 땅이 멈춰있나? 해와 달은 자리다툼을 하나? 누가 이것들을 조정하나? 끈으로 묶어 당기나? 누가 아무 일없이 한가롭게 움직이는 걸까? 땅은 기계처럼 움직이는 것일까? 저절로 움직이는 것일까? 구름이 비를 오게 할까? 비가 구름을 만드는 걸까? 누가 구름을 일으키고 비를 내리게 하나? 할 일이 없어 그저 재미로 그렇게 하나? 바람은 북쪽에서 생겨, 서쪽으로 불고 동쪽으로 부는가? 위로 불면 빙빙 도나? 누가 불었다가 마셨다 하는 걸까? 누가 부채질이라도 하나? 아, 어찌 된 일인지 알고 싶구나.”

오늘날이라면 천동설이냐 지동설이냐? 일식과 월식을 관찰한 것이냐? 중력에 법칙을 끈으로 비유한 것이냐? 유신론이냐 무신론이냐? 자동설이냐 타동설이냐? 대기의 움직임은 도대체 어떻게 생겨나는 것이냐? 기상과 일기는 어떻게 예상할 수 있느냐? 등의 질문으로 바꿀 수 있을 것만 같습니다. 하나하나가 모두 거대한 질문이고, 오래된 질문이고, 하나의 답으로 답할 수 없는 질문들입니다. 장자가 던진 질문의 크기는 참으로 크다할 수 있겠네요.


최근 들어 거대한 역사(big history)를 다룬 책들이 유행하고 있습니다. 우주의 탄생으로부터 우주 전체를 조망하는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나 인류 전체의 모습을 조망한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는 그 대표적 저술이라 할만합니다. 칼 세이건은 태양계 끝에서 바라본 지구의 모습을 ‘창백한 푸른 점’에 비유한 적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인류가 발견한 행성 중 유일하게 생명체가 발견된 행성입니다. 이 별에 인간이 등장하여 수많은 신분과 계급이 만들어지고, 수많은 종교와 이데올로기가 만들어졌으며, 그러한 이념과 제도들의 충돌이 인류를 전쟁으로 몰아갔고, 학살과 억압, 기아와 난민들을 출현시켰습니다. 특히 절대와 최고를 자랑하는 이념과 제도일수록 더욱더 인간을 궁지에 몰아넣었습니다.

공산이 독재를 정당화하고, 민주가 차별을 용인하며, 정의가 불의를 낳고, 자유가 불평등을 조장하는 이상한 역사를 지금껏 체험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행복을 위한다고 만들어놓은 이념과 제도가 오히려 인간을 노예로 만드는 모습은 이제 너무도 흔하여 굳이 사례를 들지 않아도 될 듯합니다.   

   

장자 14편인 <천운(天運)>편을 읽다 보면, 과거 임금의 업적이나 그들이 만들어놓은 이념이나 제도를 칭송하고 따르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 다양한 사례를 들어 비판합니다. 유학에서 칭송해 마지않는 공자도 예외는 아닙니다. 사금이란 인물은 공자를 평하기를, 제사 때 사용하고 버려지는 제사용 짚강아지를 주워다 소중하게 보관하는 사람과 같다고 말합니다. 시간에 따라 변하는 예의나 법도를 모르고, 옛 주나라의 법도를 따르려고 하는 것은 “원숭이를 데려다 주공의 옷을 입혀놓은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원숭이는 옷을 물어뜯고 찢어버리고 몽땅 없앤 뒤에야 만족할 것입니다. 지금이 옛날과 다른 것은 원숭이와 주공이 다른 것과 같습니다. 미인 서시는 가슴앓이가 있어 이마를 찌푸리고 다녔습니다. 그 동네 추녀가 그것을 보고 아름답다 여겨 집에 돌아와서는 서시를 따라 가슴에 손을 얹고 이마를 찌푸리고 다녔습니다. 마을 부자는 그걸 보고 문을 걸어 잠그고 나가지 않았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그걸 보고 처자를 데리고 마을을 떠났습니다. 추녀는 찌푸린 이마가 아름답다는 것만 알았지 왜 아름다운지는 몰랐던 것입니다. 안타깝습니다. 공자도 이런 궁지에 빠질 것입니다.”라고 혹독하게 비판합니다.     


공자를 비판하는 글을 읽다가 뜨금해집니다. 나 역시 옛 찌꺼기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인문학자로서 변화된 세상을 읽어내지 못하고, 낡은 세계를 고집하는 사람은 아니던가? 미인 서시의 아름다움은 간파하지 못하고 그의 찌푸린 이마만을 칭송하는 뚜쟁이는 아니었던가? 아니 그 서시의 이마를 따라 하다가 주변 사람들의 외면을 당하는 신세로 전락한 것은 아닌가? 이미 궁지에 빠진 것조차 모르고 있는 건 아닌가?    

 

시대착오적인 이념은 우리를 슬프게 합니다. ‘나 때’를 외치는 노년의 강변은 눈살을 찌푸리게 합니다. 역사를 되돌리는 지도자의 몸짓은 민중의 삶을 고달프게 만듭니다. 고리타분한 충고를 반복하는 어른들의 모습에 청년들은 지쳐갑니다. 부와 명예가 한쪽으로만 쏠려있는 모습은 사회를 불구로 만듭니다. 그래서 장자도 “명예란 같이 는 그릇입니다. 혼자 많이 가지려 해서는 안 됩니다. 사랑과 정의는 옛 임금의 여관입니다. 하루 저녁 묵는 것은 괜찮겠지만 오래 묵을 곳을 못 됩니다. 오래 묵으면 책망이 많아집니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책망받지 않고 스스로 자연스럽게 변화할 수 있는 길을 찾아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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