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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경윤 Oct 17. 2022

장자를 달린다 13 : 하늘의 즐거움을 아는 사람

- 13편 <천도(天道)>

하늘의 즐거움을 아는 사람은 [知天樂者]

삶이 천체의 운행과 같고, [其生也天行]

죽음이 물건의 변화와 같다. [其死也物化]

고요할 때에는 음(陰)과 같은 덕을 지니고, [靜而與陰同德]

움직일 때에는 양(陽)과 같은 율동을 지닌다. [動而與陽同波]

그러므로 하늘의 즐거움을 아는 사람은 [故知天樂者]

하늘에 대한 원망이 없고, [無天怨]

사람에 대한 비난이 없고, [無人非]

물건에 의한 재난이 없고, [無物累]

귀신에 의한 책망이 없다. [無鬼責]          


공자가 성인의 길을 따르려는 사람이었다면, 장자는 성인이 따랐던 하늘의 길을 따르려는 사람이었습니다. 성인의 길을 따르려는 사람은 성인이 이룩한 문명을 본받았고, 하늘의 길을 따르려는 사람이 하늘이 따랐던 자연을 본받았습니다. 이를 일컬어 인위(人爲)의 길과 무위(無爲)의 길이라 합니다. 인위의 길과 무위의 길은 겹치기도 하고 구별되기도 합니다. 인위의 길은 쌓이는 길이고, 무위의 길은 쌓이지 않는 길입니다. 쌓이면 문명이 되고, 쌓이지 않고 움직이면 자연이 됩니다. 제왕이나 성인은 문명의 길로 갈 수도 있고 자연의 길로 갈 수도 있습니다. 문명이 하늘의 길을 잊지 않는다면 오래가고, 하늘의 길을 잊게 된다면 편리와 이익을 좇는 쇄락의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장자 13편 <천도(天道)>는 하늘의 길을 가는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이는 12편 <천지(天地)>와 14편 <천운(天運)>과 더불어 무위자연(無爲自然)의 하늘을 본받아 본래의 삶으로 돌아가라는 장자의 외침이 생생하게 전달되고 있습니다. “텅 비고 고요하며 적막하게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 하늘과 땅의 기준이며, 도덕의 극치입니다. 그러므로 제왕이나 성인은 그런 경지에 머뭅니다. 거기에 머물면 텅 비게 되고, 텅 비면 모든 것이 차게 되고, 모든 것이 차면 갖추게 됩니다. 텅 비면 고요하고, 고요하면 움직이고, 움직이면 얻게 됩니다. 고요하면 무위하고, 무위하면 일을 맡고 책임을 지게됩니다. 무위하면 즐겁게 되고, 즐거우면 걱정과 근심이 없어져 장수할 수 있습니다”

아울러 하늘의 본받는 사람의 즐거움을 이야기합니다. “사람과 조화하는 것을 인간의 즐거움이라 하고, 하늘과 조화하는 것을 하늘의 즐거움이라고 합니다.” 장자는 하늘을 스승이라 말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외칩니다. “나의 스승이여, 나의 스승이여! 만물의 변화에 눈물 흘리지 않고, 오래도록 혜택을 주면서도 어질다 하지 않고, 오래되었으나 오래되었다 하지 않고, 만물의 형상을 부여하였으나 솜씨 좋다 하지 않나니. 이것이야말로 하늘의 즐거움이리라!” 또한 “하늘의 즐거움은 성인의 마음으로 천하를 양육하는 것이니, 제왕의 덕은 하늘과 땅을 조상으로 삼고, 도와 덕을 주인으로 삼으며, 무위를 법도로 삼는 것이다. 무위하면 천하를 다스리는데 쓰고도 남으나, 유위하면 천하를 다스리는데 부족하다. 그러므로 옛사람들은 무위를 귀중하게 여겼다.”라고 말합니다.     


<천도> 편에는 순임금과 요임금의 이야기도 재밌고. 노자를 찾아가는 공자와 사성기의 이야기도 재밌습니다만, 저는 제나라의 환공과 수레바퀴를 는 목수의 얘기에 눈이 갑니다. 삶과 말과 글의 관계를 밝히고 있는 이 에피소드는 글을 쓰는 저 같은 사람에게는 사뭇 놀라운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에피소드를 소개하기 앞서 장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도를 배울 때 세상에서 귀중하게 여기는 것은 글입니다. 하지만 글이란 말에 지나지 않습니다. 말이 귀하지요. 그런데 말이 귀한 것은 뜻이 있기 때문입니다. 뜻은 따르는 바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뜻이 따르는 바는 말로 전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세상은 말을 귀하게 여기고 글로 전하려 합니다. 이는 귀한 것이 못됩니다. (...) 그래서 아는 사람은 말하지 않고, 말하는 사람은 알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어떻게 그것을 알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말해놓고 뒤 이어 환공과 목수가 등장합니다. 환공은 대청마루에서 책을 읽고 있고, 뜰 아래에는 목수가 수레바퀴를 깎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목수가 망치와 끌을 내려놓고 환공에게 올라와 묻습니다. “임금께서 읽고 계신 것에는 무엇이 쓰여 있는 지요.” 환공이 대답합니다. “성인의 말씀이다.” 목수가 묻습니다. “성인은 살아계신지요?” 환공은 “이미 돌아가셨다.” 그러자 목수가 말합니다. “그렇다면 임금께서 읽고 계신 것은 성인의 지꺼기로군요.” 이말에 화가 난 환공이 “감히 수레바퀴나 깎던 놈이 성인의 글을 농락하다니 제대로 해명하지 많으면 죽여버리겠다.”

목숨이 절체절명에 놓인 순간인데도 목수는 태연하게 말합니다. “수레바퀴를 깎는 일로 미루어 말한 것입니다. 수레바퀴를 깎을 때 엉성히 깎으면 헐렁해지고, 꼼꼼히 깎으면 빠듯해져 서로 들어맞지 않게 됩니다. 들어맞게 깎으려면 손의 감각과 마음이 그때그때 호응해야지 입으로 말할 수가 없습니다. 저는 아들이 있지만 그 법도를 말로 표현할 수 없어 말로는 가르치지 못하고, 아들도 말로는 배울 수 없습니다. 그래서 나이 칠십이 되도록 제 스스로 수레바퀴를 깎고 있는 것입니다. 옛사람의 정신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말로는 전할 수 없으니 옛사람과 함께 죽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니 임금께서 읽고 계신 것은 옛사람의 정신이 아니라 지꺼기입니다.”     


생생한 자연과 인위의 문명, 생생한 삶과 인위의 말과 글의 대비는 이토록 다양하게 변주됩니다. 문명의 이기에 현혹되어 자연을 잊거나 화려한 말과 글에 빠져들어 본래 전하고자 했던 귀한 뜻을 잊지 말자고 장자는 말하는 듯 합니다. 말과 글에 빠지지 말자는 장자의 글을 읽고 있는 나는 아득해집니다. 말의 문제를 말로 전하고, 글의 한계를 글로  표현해야하는 아이러니는 작가의 운명인가 봅니다. 우리는 하늘에서 얼마나 멀리 떨어진 것일까요? 말과 글은 뜻에서 얼마나 멀어진 것일까요? 하늘의 즐거움에 도달하려면 얼마나 먼 길을 가야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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