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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경윤 Oct 11. 2022

장자를 달린다 12 : 사람의 마음 기계의 마음

- 12편 <천지(天地)>

도란 만물을 덮어주고 실어주는 것이다. [夫道覆載萬物者也]

얼마나 넓고 큰가 [洋洋乎大哉]

군자들이 그의 마음을 비우지 않으면 받을 수 없다. [君子不可以不刳心焉]

무위로써 일하는 것을 하늘이라고 말한다. [無爲爲之之謂天]

무위로써 말하는 것을 덕이라고 말한다. [無爲言之之謂德]   

   

사람의 몸은 사방 2미터를 넘지 못하지만, 그의 마음은 물리적 거리를 넘어섭니다. 그 마음을 자신에게만 쏟으면 이기주의자가 되고, 가족에게만 국한시키면 가족주의자가 됩니다. 비록 작은 몸뚱이지만 그 몸뚱이가 품은 생각의 크기가 그 사람의 크기가 됩니다. 가족만 품은 사람에게 공동체를 맡길 수 없고, 지역만 품은 사람에게 나라를 맡길 수 없으며, 나라만 품은 사람에게 세상을 맡길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 그 사람이 지닌 마음의 그릇보다 더 큰 것은 줘도 못 받게 됩니다.

장자의 도(道)는 우주만물을 품습니다. 가장 큰 것이라 볼 수 있지요. 그래서 그 도를 품으려는 자는 우주만큼 그 마음을 비워야 합니다. 그 마음의 크기가 우주를 담을 수 있다면 그는 억지로 일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일하게 되고, 억지로 말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말하게 됩니다. 태어나고 죽음도, 가난과 부유함도, 지위의 높음과 낮음도 그를 좌지우지하지 못합니다. 그는 하늘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장자 12편인 <천지(天地)>는 이러한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그 마음이 하늘과 땅만큼 바다만큼 커서 널리 만물이 그를 따르는 사람, 금을 산에 저장하는 사람, 진주를 연못에 저장하는 사람, 재물을 이익이라 생각하지 않고 부귀를 가까이하려 들지 않는 사람, 오래 사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일찍 죽는 것을 슬퍼하지 않는 사람, 재물로 얻은 것을 영화롭다 여기지 않고, 궁핍함을 수치로 생각하지 않는 사람!” 그런 사람이라면 천가의 임금 자리도 영예롭다 여기지 않을 것입니다. 그에게 “만물은 한 가지 세계이며, 생사는 같은 모습일 뿐입니다. [萬物一府, 死生同狀]”

<천지> 편에 등장하는 사람들을 열거해 보자면 ; 전설의 임금 황제와 신하 상망, 요임금과 스승 허유, 요임금과 화땅의 국경지기, 우임금과 제후 백성자고, 공자와 노자, 공자의 제자 자공과 채소밭의 노인 등이 등장합니다. 장자 이야기의 재미난 점은 위대한 사람들이 무명인에게 도를 전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무명인들이 위대한 성인에게 도를 전하는 방식으로 전개된다는 점입니다. 그중에서 오늘날에 읽어도 그 울림이 큰 에피소드 하나를 소개합니다. 자공과 노인의 이야기입니다.


공자의 제자 자공인 초나라를 유람하고 진(晉)나라를 돌아오다가 강가에서 채소밭을 돌보는 노인을 보게 됩니다. 노인은 땅을 파고 우물에 들어가 항아리로 물을 퍼 채소밭에 물을 주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이 힘들어 보이고, 일에 진척도 없어 보였습니다. 자공은 노인을 불쌍히 여겨 밭에 물을 대는 기계를 써보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안합니다. 나무에 구멍을 뚫어 만든 기계인데 뒤는 무겁고 앞은 가벼워 손쉽게 물을 푸고 빠르게 물을 나를 수 있습니다. 요즘 말로 치면 기계화, 자동화 장치를 설치하면 삶의 편리를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노인은 친절한(?) 말을 하는 자공에게 이렇게 응대합니다.

“내가 우리 선생님에게 들으니, 기계를 가진 자는 반드시 기계를 쓰려하고, 기계를 쓰는 자는 반드시 기계에 마음을 쓰게 되고, 기계를 쓰려는 마음[機心]이 가득 차 있으면 순박함이 사라지고, 순박함이 사라지면 정신과 성격이 불안정해지고, 정신과 성격이 불안정해지면 도(道)가 깃들지 않게 된답디다. 나는 기계의 쓰임을 알지 못해 사용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기계를 쓰는 것이 부끄러워 쓰지 않고 있지요.”

자공은 노인의 말을 듣고 부끄러워 얼굴이 하얗게 변합니다. 자공이 공자가 아닌 다른 스승을 만나게 된 것이지요. 훗날 자공이 노나라에 돌아와 공자를 만나 그 노인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그러나 공자는 자공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그는 혼돈씨의 술법[混沌氏之術]을 배워 닦은 사람이다. 그는 하나를 알고 둘을 모르며, 안을 다스리고 밖을 다스리지 않는다. 그의 마음은 밝고 소박하며, 무위로 소박함을 회복하고 본성대로 신과 함께 속세에서 놀고 있는 중이다. 뭘 그리 놀라느냐? 혼돈씨의 술법을 너와 내가 어찌 알겠느냐?”     


<천지> 편에서는 공평하게도 노인만 부각하지 않고 이야기 끝에 공자를 등장시켜 사태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거리를 제공합니다. 자, 이제 자공에게 두 명의 스승이 있습니다. 한분은 늘 모시고 따르는 공자입니다. 세상만사를 분별하고 백성을 사랑하고 그들의 삶을 더 좋게 만들기 위해 애써 실천하는 스승입니다. 그의 관심사는 눈앞에 펼쳐진 노나라의 실정이며, 그 실정을 개선하는 것에 헌신합니다. 또 다른 스승은 채소밭에서 만난 노인입니다. 인간의 편리를 제공하는 기계를 몰라서 사용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 기계의 사용이 궁극적으로 천지간에 살아있는 도를 훼손하고 인간의 순박함을 사라지게 하여 인간의 정신과 성격을 불안정하게 만들까 봐 사용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스승입니다.      


근대화의 시기라면 공자를 따르겠지만 근대 이후에 4차산업의 도래와 기후 위기와 양극화 현상을 겪고 있는 현대라면 노인의 가르침에 더 귀를 기울이게 됩니다. 천지의 마음을 인간의 마음으로 축소시키고, 다시 인간의 마음을 기계의 마음으로 변형시키는 ‘호모 데우스’의 운명을 사뭇 걱정하게 됩니다. 단 하루도, 아니 단 한 시간도 스마트폰이 없으면 불안해하는 사람들이 쉽게 관찰됩니다. 그렇게 우리는 부지불식 중에 기계의 마음에 자신을 동조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 좁은 손바닥 세계에 갇힌 채 살아가는 삶이 행복한가? 거기에 빠져 있는 동안 인간의 마음은 어디에 있는가? 노인이 그렇게 우리에게 묻고 있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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