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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경윤 Nov 15. 2022

장자를 달린다 16 : 문명의 계보학

- 16편 <선성(繕性)>

세상은 도를 잃었고, [世喪道矣]

도는 세상을 잃었다. [道喪世矣] 

세상과 도가 서로를 잃었던 것이다. [世與道交相喪也]

그러니 도를 닦는 사람인들 무슨 수로 세상을 일으키겠으며, [道之人何由興乎世]

세상 역시 무슨 수로 도를 일으키겠는가? [世亦何由興乎道哉]

도는 세상에 일어날 수 없고, [道無以興乎世]

세상은 도를 따라 일어날 수 없다. [世無以興乎道]     


인간은 언어를 배우면서 진선미(眞善美)를 추구해왔습니다. 내 말은 진실한가? 내 말은 선한가? 내 말은 아름다운가? 우리는 묻습니다. 그리고 흔들리지 않는 태도와 입장을 모아 지식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지식을 다시 언어로 전하려 노력했습니다. 그래서 그랬는지 말에는 힘이 있습니다. 말에는 지시적 기능 말고도 수행적 기능이 있습니다. ‘칼’이라는 단어는 칼 모양의 물체를 가리키는 기능도 있지만, “칼은 위험하니 만지지 마.” 라든지 “저기 있는 칼을 갖다 줘.”라는 명령과 부탁의 기능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랑’이라는 말도 어떤 마음의 상태를 지시하기도 하지만, “나는 당신을 사랑한다” 라든가 “당신도 나를 사랑해줬으면 좋겠어”라는 마음의 태도를 상대방에게 강제하기도 합니다.

어떤 말은 상대방에게 위로가 돼주기도 하지만, 어떤 말은 상처를 주기도 합니다. 부정의 말은 상대방을 해칩니다. 부정의 말뿐만 아니라 긍정의 말도 상대방에게 잘못 가닿아 부정적 효과를 낳기도 합니다. 우리나라에는 ‘자유’라는 말을 사랑하는 지도자가 있어 시도 때도 없이 ‘자유’를 외치지만, 정작 그 말을 외친 지도자는 ‘자유’롭지 못합니다. 아무리 좋은 말이라 할지라도 그 발화자가 그 말을 구현할 수 없을 때, 무력하거나 조롱거리가 되기도 합니다. 말은 상대방에게 무기처럼 쓰여 화살로 날아가기도 하지만, 자신을 해치는 부메랑으로 날아오기도 합니다. 말로는 세상을 구할 수 없습니다. 

    

박남수가 쓴 <새>라는 시가 있습니다. 중간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새는 노래한다. / 그것이 노래인 줄도 모르면서 // 새는 그것이 사랑인 줄도 모르면서 / 두 놈의 부리를 /서로의 죽지에 파묻고 / 따스한 체온을 나누어 가진다.” 새는 인위적 언어 없이 본성으로 노래하고 사랑합니다. 새의 삶에는 과장이나 허위나 화려함이 필요 없습니다. “새는 울어 / 뜻을 만들지 않고 / 지어서 교태로 / 사랑을 가식하지 않는다.”라고 시인은 노래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새처럼 살지 못합니다. 본성에 뭔가를 덧붙이려 합니다. 노자는 이러한 현상을 인위(人爲)라 말하고 비판적으로 보았습니다. <도덕경> 38장에는 이 인위의 현상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도가 없어지면 덕이 나타나고, 덕이 없어지면 인이 나타나고, 인이 없어지면 의가 나타나고, 의가 없어지면 예가 나타난다. 예는 충성과 신의의 얄팍한 껍질이며 혼란의 시작이다.”


이 <도덕경> 38장을 이야기로 펼치면 《장자》 16편 <선성(繕性)>이 됩니다. 이 편에서는 유교에서 떠받들었던 온갖 성인들이 비판의 대상이 됩니다. 전설의 시대에 살았던 다섯 왕을 오제(五帝)라 칭하는데, 복희(伏羲), 신농(神農), 황제(黃帝), 당요(唐堯), 우순(虞舜)이 그들입니다. 이 중에서 앞의 세 사람은 삼황(三皇)이라 말하는데, 인류문명에 필요한 엄청난 발명을 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복희는 ‘큰 하늘’이라 불렸으며, 사람 머리에 뱀 몸을 했으며, 사람에게 불과 사냥법을 알려주었습니다. 신농은 소의 머리에 사람 몸을 했으며 사람에게 농업과 상업을 가르쳤습니다. 황제는 사람에게 집 짓는 법, 옷 짜는 법, 수레 만드는 법을 가르쳤고, 글자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 뒤를 이은 당나라의 요임금과, 우나라의 순임금까지가 전설이 임금들입니다. 순임금을 이어 하나라의 우임금, 상나라의 탕왕, 주나라의 무왕, 문왕이 유학에서 태평성대를 누린 성인(聖人)으로 추대하는 분들입니다. 외우기 쉽게 ‘요순우탕문무’가 바로 성인이지요.

그런데 <성선>편에서는, 수인과 복희가 천하를 다스리자 자연과 하나가 되지 않았고, 신농과 황제가 천하를 다스리자 자연을 따르지 않았으며, 요와 순이 세상을 다스리자 인위적 정치로 순진함과 소박함이 사라지고, 도에서 멀어지고 덕을 저버리게 되었다고 평합니다. 그 뒤를 따르는 임금들은 문명을 더하고 지식을 쌓아 백성들이 결국 미혹되어 혼란을 일으키게 되었다고 혹평합니다. 문명의 계보학이 의심되고, 진보의 역사학은 부정됩니다. 인간의 문명은 시간이 흐를수록 도(道)와 가까워지는 것이 아니라 도에서 멀어집니다. 불은 파괴이고, 농업은 사기이고, 정착은 노예화이고, 문자는 허구입니다. 역사가 흐를수록 “세상이 도를 잃었고, 도는 세상을 잃었습니다.” 장자의 문명 진단이 심하지 않은가요?     


현대사회라 해서 다를까요?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의 진단대로, 인지혁명, 농업혁명, 과학혁명을 통과한 인류는 비약적인 물질문명의 발전을 가져왔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발전에는 커다란 희생이 따랐습니다. 자연의 동물들은 대부분 멸종했으며, 인류종도 사피엔스종만이 살아남았습니다. 자연은 회복이 불가능할 정도로 훼손되었고, 생태는 파괴되었으며, 지구온난화는 걷잡을 수 없이 가속화되고 있습니다. 우리 인류의 삶이 더욱 쾌적해지거나 행복해진 것도 아닙니다. 심지어 우리는 우리의 멸종을 향해 눈먼 채 질주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네요.     


자유를 외치는 자 자유롭지 못하고, 정의를 외치는 자 정의에서 멀어집니다. 사랑을 말하는 곳에서 의심이 생겨나고, 믿음을 강조하면 불신의 세상이 틀림없습니다. 말없이 실천하면 의심이 사라지지만, 말로만 해결하려 하면 분노가 쌓이게 됩니다. 도(道)는 언어에 담을 수 없고, 언어에 담긴 도는 도가 아닙니다. 인간의 문명은 대부분은 지배자의 언어로 쌓아놓은 모래탑과 같습니다. 굳건할 것 같지만 언제나 허망하게 무너져 내렸습니다. 현대문명을 성찰하면서 자연을 회복할 시간이 남아있을까요? 만약에 희박하지만 그러한 시간이 남아있다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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