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파도 일기 4 : 삼시 세 끼
2023.7.8.
삼시 세 끼를 꼬박꼬박 챙겨 먹은 적이 그 언제였던가? 바쁘다는 핑계로, 졸리다는 핑계로 끼니를 거른 적이 많았다. 밤샘하고 귀가한 날이면 밥 먹는 것보다 자는 게 중요했다. 그런데 가파도에 있으면서 연 나흘을 삼시세끼 챙겨 먹고 있다.
나 혼자 지냈다면 결코 하지 않았을 일이다. 그런데 친구랑 있으니 일단은 그의 리듬을 따르게 되었다. (그가 가파도는 선임(先任)이니까.) 그런데 이 친구 꽤나 규칙적이고 부지런한 친구였다.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고 하루 세 번 산책하고 하루 세 번 끼니를 챙겨 먹는다. 나도 그를 따라 산책하고 (가끔 자전거 타기도 하고) 삼시 세 끼를 꼬박 챙겨 먹고 있다. 기억을 더듬어 메뉴를 기록해 본다.
도착날 점심 : 도미 매운탕, 문어숙회, 뿔소라, 부추전, 막걸 리 (친구의 지인들과 외식)
도착날 저녁 : 마파두부밥, 어묵탕
둘째날 아침 : 스파게티
둘째날 점심 : (외식) 부추전, 막걸리 2통
들째날 저녁 : 삼겹살 구이, 물만두, 한라산 소주 1병
셋째날 아침 : 찐 감자, 토스트
셋째날 점심 : 일본식 우동
셋째날 저녁 : 떡만둣국
넷째날 아침 : 마파두부밥, 쨈 바른 식빵
넷째날 점심 : 마파두부밥, 부추전, 물만두(손님 초대)
넷째날 저녁 : 비빔국수 (야식을 위해 간단히)
넷째날 야식 : 김치찌개, 삶은 거북손, 프랑크 소시지, 한라산 소주 1병 (손님 초대 실패)
내가 만든 메뉴를 찍어봤다. 삽겹살, 물만두, 떡만두국, 비빔국수, 김치찌게는 내가 요리(?)했다. 너무 잘 먹어서 비상용으로 챙겨간 소화제를 두 번이나 먹었다. 운동으로 빠진 살을 식사로 채워 넣는 경이로운 삶의 순환이라니! 다음 주 화요일에 친구가 일이 있어 고양시로 돌아가면 나 혼자 식사를 챙겨 먹어야 하니, 하루 세 끼 먹는 일은 중단되겠지만, 어쨌든 친구의 이 성실하고 규칙적인 식사버릇은 경탄할 만한 일이다.
친구에게 슬쩍 동화되었는지, 어느덧 나도 식사를 마치고 설거지를 하면서 자동으로 친구에게 묻게 된다.
"다음 식사는 월 먹지?"
이렇게 먹다 보니, 2주 예상하고 준비해 간 식량과 반찬거리가 푹 줄어들었다. 휴식과 창작을 위해 가파도로 온 나의 삶이 온통 운동, 식사, 운동, 식사, 운동, 식사를 시계불알처럼 반복하고 있다. TV에서 본 <삼시 세 끼> 프로그램이 저절로 떠오른다. (그걸 보며 참 한심하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지금 그러고 있다.)
그런데 놀라운 점은 이렇게 생활하는 게 하나도 불안하지 않다는 것이다. 도시에 있었다면 늘 스케줄에 쫓겨 다음 할 일을 생각하고 있을 텐데, 그래서 밥 먹는 시간도 아까워했을 텐데, 스케줄 거의 다 물리고 가파도로 내려와 밥만 먹고 있어도 의외로 괜찮다.
세상은 나 없이도 잘 돌아갈 것이고, 내가 애쓴다고 크게 바뀌지 않는다는 것을 알만한 나이가 돼서 그런가? 삶의 속도를 낮추고, 있는 듯 없는 듯 지내는 이 시간이 진짜 휴식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어차피 시간이 흐르면 이태껏 살아온 관성대로 뭔가 하기야 하겠지만, 일단은 책 한 줄 안 읽고 글 한 줄 안 쓰는 이 비워진 삶을 만끽해보고 싶다. 내 인생에서 이런 날이 또 언제 오겠는가. 이때라도 아무 생각 없이 식사가 성사(聖事)라 여기며 감사하리라.
'그런데 내일 아침은 뭘 먹지?'
바닷가 바위에 붙어있는 거북손을 긴 낫으로 체취하여 물에 잘 씻은 후 삶아 먹어 봤는데 공들인 노력에 비해 맛은 별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