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파도 일기 14 : 종일 비

2023. 7. 17.

by 김경윤

가파도에서 2주간이 지났다. 가파도 한 달 살기라면 딱 중간지점이다. 반환점이다. 밖에는 종일 비가 온다. 오늘은 차분히 집안일을 하기로 한다. 늘 그랬듯 고양이 퍼스트! 밥을 주고, 물 갈고, 똥을 치운다. 오늘은 스페셜 이벤트가 있다. 내가 어제 거금(?)을 주고 사온 향기 나는 모래를 갈아주는 것이다. 새로 갈아주었더니 내 기분이 상쾌하다. 고양이들도 상쾌했으면 좋겠다.


아침식사는 간단히 콩국수를 해서 먹기로 한다. 어제 콩국물과 오이와 채칼을 사 온 것은 콩국수를 먹기 위한 빅픽쳐(?)였던 셈. 국수를 넉넉히 끓였더니, 너무 많다. 이를 어쩐다? 어쩌긴 다 먹어치워야지. 반을 갈라 반은 콩국수로, 반은 비빔국수로 만든다. 짬짜면에 있듯이, 콩비빔국수가 있다. 넉넉히 썰어놓은 오이채도 사이좋게 반씩 나눠 넣는다. 두 그릇을 먹는다. 먹는 순서는, 담백한 콩국수로 시작하여, 새콤달콤한 비빔국수를 거쳐, 조금 남겨놓은 깨끗한 콩국물로 마무리한다.

식사를 마치고, 시원한 냉커피를 만들어 마당카페(?)에서 잠시 음악을 감상하려고 했는데, 비가 계속 온다. 그냥 실내에서 음악을 틀어놓고 커피를 마신다. 오늘 할 일의 순서를 머릿속으로 그려본다.

우선 어제 장터에서 사 온 재료들을 정리한다. 어제는 대충 냉장고 빈칸에 쑤서 넣었는데, 그러면 규모가 생기지 않는다. 나에게 식량과 부식이 얼마나 남았는지 한눈에 파악할 수 있도록 음식재료들을 소분하고 잘 정리해 두어야 한다. 냉장고부터 정리하자. 야채 칸에 처박아 둔 대파를 잘라 타파에 잘 담아둔다. 풋고추도 먹기 편하게 타파에 담아두자. 돼지고기는 소분하여 냉동고로, 김치는 적당량 나누어서 먹기 편하게 작은 타파에 나누자. (남은 김치는 김찌지게를 끓일 때 써야겠다.) 오이장아찌는 씻어놓은 잼병에 담아서 타파를 줄이자. 보리된장을 작은 타파에 덜어 고추를 찍어먹을 수 있는 양념된장으로 만들어 놓자.

술은 술대로, 물은 물대로, 양념은 양념대로, 눈에 잘 띄게 배치하자. 냉장고 선반을 순간접착제로 고쳤으니, 그곳에 캔맥주를 담아두자. 아, 그리고 어제 간식으로 사 두었던 찐 옥수수는 보관하지 말고 후딱 먹어치우자. (쉬면 버린다.) 어제저녁에 하나 먹었으니 오늘 점심과 저녁 사이에 간식으로 하나 먹자.(남은 하나는 내일 간식으로.)

이제 먹는 거는 어느 정도 정리했으니, 집안 대청소를 하고, 빨래를 하자. 밖에 비가 오기는 하지만 실내에 있는 줄에 널었다가 비가 그치면 밖으로 가지고 나가서 말리자. 우선은 실내에서 작동하는 공기청정기의 제습기능을 활용하자. 시트 커버, 쿠션과 베개 커버를 세탁기에 돌리고, 집안으로 가져와 거실에 걸려있는 줄에 걸어놓고 아래에 제습기를 가동한다. 전기청소기로 집안을 청소한다. 구석구석에 죽은 벌레들이 많이 있다. (이곳에서 살려면 벌레들과 친해져야 한다. 어제는 엄청 큰 바퀴벌레를 보고 말을 걸었다. 실내로 들어오면 내가 죽일 수밖에 없으니, 내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숨어 살아라. 나도 웬만하면 평화주의자로 살고 싶으니까.)

며칠 전부터 잠을 자는 밤을 제외하고는 안방과 건넌방의 방문은 닫아놓았지만, 거실문과 창문, 화장실로 연결된 문을 열어놓고 생활하고 있다. 낮에는 고양이와 공생을 시작한 것이다. (낮에도 문을 닫아놓고 지내자니, 갑갑하고 더워서 못 살겠더라. 에어컨에 의존하는 것도 못마땅하고.) 이제 고양이들이 자연스럽게 들랑날랑한다. 내 일을 방해(?)하지 않는다면 우리 사이의 평화도 지속될 것이다.

비가 오는 날은 독서도 제법 괜찮은 활동이다. 창문을 열어 빗소리를 들으며, 김상욱이 지은 <하늘과 바람과 별과 인간 : 원자에서 인간으로>를 읽는다. 가파도에 오면서 5권의 책을 가져왔는데, 이제야 비로소 책을 읽을 수 있는 마음상태에 도달했다. 오기 전에 절반 이상을 읽어두었기 때문에 생명파트부터 읽으면 된다. 집중력이 높아져 글이 잘 읽힌다.

3부 마지막 부분에 '물리학자에게 사랑이란' 글은 따뜻한 웃음을 자아내는 퍽 괜찮은 에세이다. 글을 읽다가 빵 터지는 문장이 있었는데, "너를 만나기 위해 박테리아에서 진화해 여기에 왔어."라는 말하거나, "너를 만나기 위해 공룡이 다 멸종했어."라고 고백하면 상대방이 감동할까? (감동까지야? 깔깔거리며 웃을 것 같기는 하다.) 이 에세이의 마지막 단락은 이렇게 끝난다. "결국 물리적으로는 아무 의미 없는 필연의 우주에서 너를 만난 이 사건은 내가 아는 유일한 우연이다. 이렇게 너와의 만남은 아무 의미 없는 필연의 우주에 거대한 의미를 만들게 한다. 이것이 바로 물리학자의 사랑이다."(312~313쪽)

어느새 저녁 먹을 시간이다. 저녁 메뉴는 얼큰한 된장찌개에 어제 산 풋고추를 양념된장에 팍팍 찍어 먹기로 아침부터 계획했다. 지난번 카레를 하고 남은 재료를 이미 보관해 두었으니, 굳이 재료준비를 할 필요가 없다. 끓는 물에 된장을 풀고, 멸치액젓으로 간을 맞춘 후, 감자, 당근, 양파, 돼지고기를 넣고 팔팔 끓이다가 두부를 적당한 크기로 썰어서 한 번 더 끓이면 된다. 고추를 찍어먹을 양념된장은 이미 만들어놓았으니, 밥을 씻어 안치면 저녁준비 끝!

오늘은 집 밖을 한 발짝도 안 나간 기록적인 날이 될지, 아니면 밥을 먹고 나서 비가 오든 말든 한 바퀴 휙 둘러볼지 아직은 모르겠다. 밥 먹고 생각해 보자.

밥 먹고 생각해 봤더니, 역시 비가 많이 내려 안 나가는 게 좋겠다. 커피 한 잔 하며 읽던 책이나 마저 읽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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