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파도 일기 21 : 마라도 나비효과 1

2023. 7. 23.

by 김경윤

시작은 간단했다. "가파도에서 한 달 살기를 하는데, 마라도 한 번쯤은 다녀와야 하는 거 아냐?" 이렇게 슬쩍 운을 떼자 "그렇죠!" 매표소 직원이 쿵짝을 맞췄다. 한술 더 떠서 "어디 시간 한 번 알아볼까요?"로 이어졌고, 그렇게 해서 내일 아침 9시 20분 가파도를 떠나서 운진항에 9시 35분에 도착하면, 바로 9시 40분 마라도로 떠나는 배편이 있는데, 도착해서 예매하면 늦어지니까 곧바로 인터넷 티켓발매가 가능한 사이트에 들러 예매하고. 어쩌고저쩌고!

그리하여 비가 계속 온다는 일기예보와는 달리 날씨도 쾌청한 일요일, 9시 20분 배를 탔다. 배는 상쾌하게 파도를 가르며 운진항으로 순항했다. 안녕, 가파도! 오늘 저녁에 보자. 그렇게 배 2층, 탁 트인 전망을 감상하며 가파도를 떠났다.

그런데. 갑자기 핸드폰으로 마라도 배를 타려면 10분 전에 승차를 완료해야 하는데, 어디 계시냐는 전화가 왔다. 나는 지금 가파도에서 운진항으로 가고 있으니 곧 도착한다 말하자 잠시 기다려보라더니 갑자기,

이라는 메시지가 떴다. 9시 40분 배는 못 탄다는 얘기다. 운진항에 35분에 도착하여 아직 떠나지 않은 마라도행 배 앞에서 호소를 해봤으나, 소용없었다. 그래서 매표소에서 11시 10분에 떠나는 마라도행 배편을 다시 끊었다. 기왕에 칼을 뽑았으니 내 오늘 반드시 마라도를 다녀오리라 다짐하여 1시간 반을 운진항에서 스텐바이하고 있었다. 그런데 30분쯤 지나자 기상악화로 마라도에 가는 배편은 모두 결항되었으니, 가파도로 돌아가시라고 안내를 받았다. 그리하여 꿈에 그리던 마라도 여행은 중단되었다. 그리고 이후로 상상도 안 했던 지옥의 행군(?)을 시작하게 된다.


기왕에 가파도를 나왔으니 곧장 다시 돌아가는 것은 사나이(?)가 해서는 안 될 일이다. 마라도행은 끊겼지만 가파도 배편은 정상운행이다. 그리하여 본토로 나오면 해야 할 일을 정리해 봤다. 우선 대정읍사무소까지 버스를 타고 가서 우리들 마트(여기서만 3만 원 이상 구입하면 가파도로 개인 배달이 가능하다.)에 들러 일주일 남은 일정에 필요한 식자재를 구입하여 발송하고, 모슬포 매일시장 근처에 있다는 다이소에 들러 건전지, 자전거랜턴, 청소포, 고양이 장난감을 구입하여 배낭에 넣고, 모슬포 매일시장을 살짝 들러 점심을 해결하고, 근처에 있다는 유명빵집에 들러 식빵 하나를 구입하고 운진항으로 돌아가는 일정을 잡았다.

그리고 결행. 호기 있게 버스를 타고 대정읍사무소에 내렸는데 우리들 마트까지 가는데 걸어서 꽤 멀다. 최소 15분 이상은 걸어야 했다. 그리고 다이소까지 차편이 없어 또 걷고, 짐을 싣고 버스를 기다렸으나 오지 않아 운진항까지 또 걷고,

걷고, 걷고, 또 걸었다. 제주도 버스들을 원망하며!

운진항으로 걸어가던 중 모슬포항이 눈에 들어온다. 이왕에 걷기로 한 것 모슬포항을 살짝 돌아보기로 한다. 어차피 배시간은 넉넉하니까. 항구에 들어가니 배가 가득 정박되어 있다. 가파도에서 구경하던 소형 낚싯배들이 아니라 갈치나 오징어를 잡을 수 있는, 전등을 줄줄이 달고 있는 최소한 중급 이상의 배들이다. 게다가 항구 주변으로 즐비하게 늘어선 수산물 가게들과 횟집들이 모슬포항의 규모를 짐작하게 한다.

모슬포항을 들러 운진항으로 해안가 도로를 따라 걷다가 거대한 물고기와 돌하르방이 세워진 작은 공원에 눈길이 간다. 살짝 들렀는데, 모슬포항의 역사 사진을 전시하고 있다. 신기해하며 구경하던 중 제주도 43 이야기가 나오고 이승만이 제주도 군인을 시찰하는 사진이 보인다. 순간 소름이 쫙 돋는다. 저항과 폭력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전시되어 있다. 별 설명도 없이. 마치 알아서 상상하라는 듯 중립적으로.

기분이 묘해진다. 생각을 떨쳐내려고 지친 발에 힘을 주고 더 씩씩하게 걷는다. 운진항이 보인다. 마지막으로 낚시용품을 파는 가게에 들러 모자에 낄 수 있는 소형 클립형 렌턴을 구입했다. 밤에 산책을 하거나 자전거를 탈 때 꼭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자, 모든 일정이 끝났고, 사야 할 것들은 대충 다 샀으니 이제 그리운 가파도로 들어가자.

라고 쓰고 마침표를 찍어야 했는데, 마라도 결항에서 시작된 나의 고생스런 하루 일과는 그렇게 끝난 것이 아니라 나비효과처럼 이어져 다음 사건을 기다리고 있었다. 가파도 마지막 배가 파도가 높게 일어 결항. 마지막 배를 타고 돌아가려고 40분 정도 여유를 두고 왔는데, 결항!


오늘 가파도로 돌아갈 길은 없다. 꼼짝없이 운진항에 갇혀 버렸다. 오늘 하루를 어떻게 지새워야 하나? 고양이들은 괜찮을까? 내일 배는 뜰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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