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비가 쏟아지더니 오늘 비가 그쳤다. 자유농장 밭장이 전화해서 오이 따가고, 풀 좀 잡으라고 한 말이 귀에 쟁쟁하다. 풀 잡는 데에는 비 온 다음날이 최적이다. 물기를 머금은 땅은 부드러워져 풀이 쏙쏙 뽑힌다. 아침 식사 후, 운동이 아니라 노동을 하기로 하고 농장으로 향한다.
비 온 다음날에는 땅이 질척거려 주말농장 회원들이 오지 않는다. 게다가 대부분 주말에 하루 정도 농장에 들르기 때문에 주중에는 더욱 한가하다. 농장에 놓아둔 작업용 장화를 신고 밭으로 향한다. 오이밭에서 오이를 따면서 고랑에서 자란 풀들을 뽑아 다시 고랑에 눕혀둔다. 이렇게 풀이나 낙엽을 덮어두면 풀들이 덜자란다.
주말농사를 짓는 사람도 자주 헛갈리는 용어가 고랑과 이랑, 그리고 두둑이다. 고랑은 밭을 만들 때 사람들이 작업하는 길이고, 두둑은 작물을 키우기 위해 흙을 쌓아 만든 곳이다. 두둑을 높게 쌓기도 하고 넓게 쌓기도 한다. (작물의 특성을 고려하여 두둑의 형태를 정한다.) 이렇게 만든 고랑+두둑을 이랑이라 한다.
비밀 멀칭을 하지 않고 흙을 살려 농사짓는 유기농 텃밭에서는 풀 잡는 일이 농사의 반이다. 때를 놓치면 풀들이 웃자라고 많이 퍼져 작물의 성장을 방해한다. 특히 비가 많이 오고 온도가 높은 여름철 풀들의 성장은 가히 경이로울 지경이다. 밭에 일주일만 오지 않아도 키(?)만큼 자란 풀들로 밀림을 이룬다. 그래서 풀은 제때 잡아줘야 한다.(풀들에게는 미안하지만 작물을 키우는 농부들은 풀과의 전쟁을 치르는 것이 일상이다. "콩밭 매는 아낙네야, 베적삼이 흠뻑 젖누나."라는 노랫말은 풀 잡는 노동의 고단함을 여실히 표현해 준다.)
말이 주말농부지, 제때 농사일을 하지 않으면 일이 두세 배로 늘어난다. 오히려 부지런한 농부보다 게으른 농부가 일이 많다. 나는 천상 게으른 농부라 고생을 자초하는 셈이다. 작물도 제때 거두지 못하면 떨어지거나, 터지거나, 꼬부라지거나, 세져서 못 먹게 된다. 이렇게 게으른 농부를 만나 내 작물들이 고생이지만, 그래도 일한 것보다 넉넉히 베풀어 주는 것이 땅의 작물들이라 감사한 마음으로 거두게 된다.
이제 장마가 지나고 가을이 오면 밭을 다시 정리하여 김장준비를 해야 한다. 오늘 거둔 작물이 거의 끝물이라 생각하니 그동안 잘 자라준 고추며 호박이며 가지며 토마토들이 고맙다. 아직 오이밭에 오이는 한두 번 더 따먹을 수 있겠지만, 나머지 작물들은 다음번에 정리할 계획이다. 정리한 밭에 배추며 무며 쪽파나 대파를 심어 김장재료를 마련해야 하니 다시 손길이 바빠지는 시기가 왔다.
무슨 일이든 마찬가지겠지만, 제때를 놓치면 힘든 법이다. "천리 길도 한 걸음부터"라는 격언은 시작의 중요함 뿐만 아니라 타이밍의 적절함도 품고 있다. 기차가 떠난 후 도착해 봐야 소용이 없는 것처럼, 일도 때맞춰 시작해야 한다.